홍콩의 화양연화 2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가 이러저러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
그가 특정한 상황과 특정한 환경에 처해 있다는 것에 대해 누구도 책임이 없다.
그의 존재의 숙명은 이미 존재했었고 또 앞으로도 존재할 모든 것의 숙명에서 분리될 수 없다.
- 니체, 우상의 황혼-
홍콩인이란 누구인가.
원래의 홍콩은 버려진 어촌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편전쟁을 끝내며 체결된 난징조약은 원래대로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기억조차 되지 않았을 이 곳의 운명을 바꿔놓는다. 청나라로부터 통치권을 양도받은 영국은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항구로 개발한다. 당시는 서구열강이 세계각지를 지배하던 제국주의의 절정기였으며 중국이 그 파고를 맞이하던 초입에 홍콩이 탄생했다. 우리가 아는 홍콩이라는 공간의 시작 자체는 서구 열강의 아시아 침략에서 기원했다 봐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이들에 의한 사건으로 비롯되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그 시작이 떳떳하다 보긴 힘들다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들의 시선하에선. 누군가의 연인관계가 그러했듯.
이윽고 중국 본토는 혼란기로 접어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넘어와 홍콩에 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영국과 이주민들간의 긴장도 있었다.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관계이니. 영국과 홍콩도 그러했다. 서구열강에 대한 중국인들의 분개를 반영한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같은 이미지가 상하이 조차지에서만 퍼졌을 것 같진 않다.
그러나, 2차대전 동안 일본군에 의한 학살과 성범죄를 동반한 고통스러웠던 점령기(홍콩일치시기)는 이런 식민관계의 이미지를 다소 변화시킨다. 다시 영국이 돌아오자 사람들은 영국을 더 나은 해방자로 느끼기까지 했던거다. 여기에다 중일전쟁이 끝나고 이어진 국공내전 말엽 수많은 사람들이 홍콩에 자리잡았는데[왕가위는 이 시기를 '일대종사'로 다룬다.], 이때의 이주민들은 중국공산당을 피해서 온 것인만큼 그들에게 영국은 보호자기도 했다.
그렇다면 홍콩인에게 있어 영국은 식민지를 다스리는 지배자인가, 아니면 피신해온 이주민을 외부로부터 지켜주는 보호자인가. 그리고 이런 홍콩에서 살아가는 홍콩인은 어떤 존재인가. 식민지인으로서 시작되었기에 홍콩인이 영국과는 구별된다 해도 중국인은 아니며, 중국에서 영국령으로 도망쳐온 이주민들이라해도 영국인이라 할 수는 없다. 둘 사이에서 홍콩인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 또한 요동쳤다.
그게 최초로 나타난 게 66년 시위였다. 홍콩은 북쪽의 구룡반도와 남쪽의 홍콩섬으로 나뉘는데, 그 둘을 잇는 페리선의 요금이 그해 갑자기 인상되자 홍콩인들은 최초로 항의시위를 벌인다. 당시 홍콩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이를 해결하지 않는 영국의 통치에 대한 불만 표출로 이어졌다. 66년 시위는 결국 진압되었으나, 영국의 통치에 대항한 홍콩이라는 기억을 남겼다. 당연한 얘기지만, 홍콩은 영국만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든, 홍콩은 본래 광둥지방으로 수천년동안 중국에 속해 있었다. 그곳이 온전히 영국이 아니라 한다면, 그렇다면 홍콩은 중국이라 할 것인가?
이듬해, 이를 두고 더 치열한 일들이 발생한다.
그것이 67폭동이다.
처음에는 노동쟁의로 시작되었으나, 당시 홍콩에 만연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이 모여 반영시위로 발전한 이 사건은 당시 중국본토의 문화대혁명을 신봉하며 홍위병과 연계된 홍콩 내 친중 급진세력이 결부되면서 과격해진다.
당시 홍콩의 북부 구룡반도에는 근래에 중국에서 피난온 가난한 이주민들이 홍콩섬의 부자와 영국인들로부터 멸시받고 있었고, 이와 대비되는 부자동네 홍콩섬에서는 영국에서 온 이주인들과 여기에 영합하여 부자가 된 기업가들이 있었으며 구룡반도의 사람들은 이들을 '돼지'라 부르며 비난하곤 했다. 공공연한 뇌물 또한 만연했다. 공무원만이 아니라 의사도 따로 돈을 받아야 진료를 해줬고, 교사 촌지는 당연했으며, 돈을 주지 않으면 소방관이 불을 끄지 않았고, 기업 채용시에도 돈을 주고받는 일이 빈번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처음에 67년 시위는 영국령 홍콩정부의 무능에 대해 분개하던 홍콩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문화대혁명과 연계되며 시위는 점차 과격해지며 홍콩경찰에 대한 공격이 이뤄지기도 하고 이에 대응하여 경찰은 발포를 하기도 했다. 여기에 급진 세력은 폭탄 테러로 보복을 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이런 테러의 대표적인 일이 아나운서이던 람반 암살이었다.
라디오를 진행하던 람반은 시위세력에 비판적 논조를 보이곤 했는데 이를 자신에 대한 적대행위라 생각한 시위대는 그에게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두명의 테러범이 람반이 탄 차를 습격하여 가두고 자동차에 불을 질러서 람반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당시까지도 시위에 대한 태도를 두고 갈라져있던 민심이 급격하게 영국정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어찌되었든 언론인에 대해서 이루어진 테러였기 때문이다. 홍콩에 대한 이해없이 친중단체들이 민간인에 대해서 가한 테러들은 역효과만 낳았다.
이후에도 폭탄테러가 이어지며 3개월정도 폭동은 더 이어지지만, 이를 통해 홍콩인의 마음 속에 명확해진게 있다. 홍콩인은 중국도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당시 문화대혁명의 광기와 경제실패로 기근자가 넘쳐나던 중국의 상황을 보면서 이런 자기이해는 더욱 공고히 자리잡았다.
홍콩인은 실제로도 이런 66년, 67년의 소요를 자신들의 정체성 형성에 빼놓을 수 없는 일로 꼽는다. 마치 한국현대사에서, 산업화와 더불어 여러 시위의 기억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홍콩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담고 있을법한 홍콩역사박물관은 홍콩반환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재 이 곳을 둘러보아도 홍콩인이 누구인가를 돌이켜볼 때 빼놓기 힘든 이 시기의 일은 의외로 크게 찾아보기 힘든데, 일부러 66, 67년 특히 67년도의 폭동에 대한 이야기는 축소시켜놓았다. 마치 기억하면 안되는 것처럼. 67년 친중 홍위병이 일으킨 테러에 대한 반추가 어떤 이들이 불편해할 정체성 자각으로 이어질까 염려라도 하듯이.
(계속...)
참고문헌
푸른 빛 블루, 홍콩의 싸움: 정체성의 관점에서, 슬로우뉴스 https://slownews.kr/73604
류영하, 중국 민족주의와 홍콩 본토주의, 산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