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애도

홍콩의 화양연화 9

by 간로

香港的 花樣年華

홍콩의 화양연화 9

-지나가 버린 것들에 대한 애도-


지나간 날들은

마치 먼지 쌓인 유리창 너머처럼,

보이지만 만질 수는 없다.

그는 줄곧 과거의 모든 것에 사로잡혀 있었다.

만약 그가 먼지 쌓인 유리창을 깨뜨릴 수 있다면,

그는 일찍이 사라진 세월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https://youtu.be/owzFkOJNwq4


우리는 수없이 지나간 것들을 애도한다.


멀티플렉스 이전 단관극장서 설레며 봤던 영화를 OTT서 발견하고서 느끼던 반가움,

스마트폰 없던 시절 알음알음으로 보러간 단콘서 열광했던 누군가의 근황 유튜브,

문득 생각나 예전 연인의 인스타에 가봤다가 잘못눌린 좋아요에 으아아 거리던 일들에,

방정리하다 나온 일기장을 들춰보다 마주친 지금보다 얼굴도 마음도 귀여웠던 옛 나와의 조우,

갤러리 한켠에 눈에 들어온, 쪼들렸지만 나름 낭만있던 이전 여름여행 사진에 그때 함께했던 친구의 연락처를 뒤적이고

서랍 사이서 우연히 발견한, 꽃다운 시절 만나 오래전 헤어졌던 누군가의 러브레터를 버리지 않고 고이 상자에 담아두기도 하는게 사람이다.


인간은 매일 과거와 이별하는 존재다.

그래서, 그 이별을 기리려 지금을 사진찍어 남겨 글을 끄적여두곤 한다.


그럼에도,

다 크고서 처음 본 친구에게서 가물가물한 어릴적 얼굴을 찾아 그때 동네로 가 다시 가위바위보하며 공터에서 놀이를 해볼수는 있을지라도, 어느 결혼식에서 오랜시간 지나 아무 원망도 남지 않은 옛 연인과 인사하다 혹시나하며 그간 안부를 나누더라도 그건 모두 먼지 쌓인 유리창 너머로의 부질없는 손짓이라는걸 다들 안다.


기억의 재발견, 놀이의 재연, 재회와 회상, 그 모든 손짓과 아우성들… 모두 먼지낀 유리창 너머에 대한 애도다.

유리창 너머에 대한 애도는 개인만 그러지는 않을게다. 지나간 시절을 다루는 글이나 소설, 드라마나 영화는 너무나도 수두룩하고, 숱한 공휴일과 기념일의 제의와 축제는 그런 과거를 돌아보는 방식이 어떻게 개인을 넘어서 더 넓은 차원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대개는 이런 애도가 때 탄 자그마한 소품 하나를 간직하곤 그걸 보며 짓는 미소거나 혹은 그때를 함께했던 이들과 한데 모여 기울이는 술한잔이겠지만.


그러나 무엇이 지나가버렸는지, 그 지나가 버린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그러한 애도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과거가 어떠한 것이었는지의 기억은 그걸 바라보는 현재와 무관할 수 없다. 현재가 비극적일수록 그와 대비되는 옛 때는 더욱 찬란하고 아름답게 남는다. 만약 옛 시절을 그저 흐뭇해하는 미소로만 추억할 수 없을 정도로 현재가 절망적이라면… 그때가 온전히 지나가버린 지금이 너무나도 비탄으로 가득히 느껴질 때라면. 그 과거가 절대로 돌아올 수 없이 아득하다는 건 그만큼의 회한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웠던 지난날을 흐뭇해하는 미소로만 추억할 수는 없게 된다. <어제의 세계>처럼.

이 책은 예전을 돌아보는 담담한 말투지만 그 사이에선 비통과 탄식이 묻어나온다. 이제 완전히 끝나버린 옛 유럽에 대한 감상을 담아 시작한 <어제의 세계>는 그대로 츠바이크가 옛 시대를 보내며 행하는 애도이다. 슬픈 현재에선 도저히 닿을 수 없을거 같은 찬란한 과거일수록 우린 거기 사로잡히고 그리워하게 된다. 결코 짧지 않은 글인 <어제의 세계>에서 자신이 살았던 ‘어제’를 묵묵히 써내려가면서 츠바이크는 자신의 방식으로 옛 시절에 대한 애도를 수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긴 미래의 누군가에 닿아 영화가 되기도 한다. 동화같은 옛시대 이야기,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 끝엔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음.”이라는 '안내'가 뜬다. 이 영화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주길 바라는지 알려주는 힌트기도 하다.


그걸 염두에 두고 영화를 다시 돌이켜보면 초입에 나오는, 구체적으로 누군지 지칭없이 그저 ‘작가’로만 나오던 흉상은 누굴 가리키는지 너무 명확히 다가온다.


그렇다면

유럽대륙 동쪽 끝 경계에 있다는, 제국이 자리했었던 영화상의 옛 주브로브카 공화국은 당연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무너졌던 자리에 있던 오스트리아일테고


옛 루츠는 서유럽 파리와 더불어 19세기 유럽문화의 중심지, 중부유럽의 수도였던 빈일거다.


그럼 이 책은? 난 이게 츠바이크의 대표작 <어제의 세계>로도 보인다.

좀 거칠게 말하면 이 영화는 대놓고 츠바이크의 '어제'에 대한 헌정영화다.

'19세기 <어제'의 세계>는 그렇게 '21세기 미래'의 영화가 되었다.


자신이 지나온 어제를 보며 긴 책을 썼던 그 애도로도 상실감을 건널 수는 없었던 걸까. 2차 대전의 확전 소식을 들으며 츠바이크는 아내와 함께 망명지 브라질에서 죽은 체로 발견된다. 자신이 자라온 세계가 온전히 종식되었음을 확신했을 때 츠바이크는 이 세계를 완전히 떠나기로 결심한거다.

그는 마지막 먼길을 떠나며 한켠에 글을 남겼다.


“유 서


이 인생에 이별을 고하기 전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유로운 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마지막 의무를 다해 두려고 합니다. 나는 나와 나의 창작 작업에 이처럼 아늑한 휴식의 장소를 제공해 준, 이 훌륭한 나라인 브라질에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날이 거듭할수록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의 말을 하는 세계가 나에게서 소멸되어 버렸고, 나의 정신적 고향인 유럽이 자멸해 버린 뒤에, 내 인생을 다시 근본적으로 새롭게 일구기에는 이 나라만큼 호감이 가는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60세가 지나 다시 한 번 완전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특별한 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힘은 고향 없이 떠돌아다닌 오랜 세월 동안 지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제때에, 그리고 확고한 자세로 이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의 인생에서, 정신적인 작업은 언제나 가장 순수한 기쁨이었으며, 개인의 자유는 지상 최고의 재산이었습니다.


모든 나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원컨대, 친구 여러분들은 이 길고 어두운 밤 뒤에 아침 노을이 마침내 떠오르는 것을 보기를 빕니다! 나는, 이 너무나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가겠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

페트로폴리스, 1942년 2월 22일”


유대인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 누구보다 ‘유럽인’이었을 그는 고향이라 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고향은 시간의 개념이기도 하니까. 행간에서 배어나오는 그의 절망감이 눈물지게 느껴진다.




그러나 츠바이크에겐 자신의 기억을 쓰고 말하고 펴낼 자유라도 있었다. 과거를 입에 올리고자 하는 또다른 누군가가 처해있는 현실은 그걸 감히 대놓고 말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엄중한 상황일 수 있다. 터부시, 주위의 시선, 사회적 박해. 과거를 입에 올리기조차 못한다면, 그것을 남몰래만 이야기해야 한다면.

모운은 그녀와의 아름답고도 사무친 이야기를 홍콩에서 아니 싱가폴에 와서도 대놓고 할 수 없다. 당시 사회에선 대놓고 올려져선 안되는 이야기니까. 결혼은 사회 질서이고 그걸 넘어선 로맨스란 어떻게 주위의 입방아에 오르내릴지 빤히 보이는 일이니까. 사회적 시선은 엄정하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기 스스로의 시선도 그와 무관할 순 없을터다. 그러니 그곳에서 살아갈 그녀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그래서 다 지나간 과거 일일지라도 그는 캄보디아까지 와서야, 아무도 없는 앙코르와트까지 가서도 돌기둥 패인 틈에 남몰래 속삭이듯 해야 겨우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에, 시대에 길이 남을 '속삭임'


이런 상황은 홍콩에서도 한동안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반환 전 옛 홍콩에 대한 감정… 그것이 과연 대놓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었겠는가.


그러나 어느 상황에선 그 감정이 남몰래 삼키는 애통한 회한에서 그치지 않고 밖으로 터져나오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먼지낀 유리창을 깨뜨리려는 시도이다.

저 손짓은 유리창을 깨뜨리기 위한 아우성일까. 2019년 홍콩시위 중.

현재가 너무나도 절망적으로 느껴지고 있다면 지나간 아름다운 옛 시절에 대한 애도가 비통과 회한에만 그치는건 아니다. 옛시절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현재 상황이 사람들을 그만큼 과거 추억의 아름다움에 사무치게 할 때, 그로부터의 분노도 애도의 방식일 수 있다.


如果他能衝破

那塊積著灰塵的玻璃,

他會走回早已消逝的歲月.

만약 그가 먼지 쌓인 유리창을 깨뜨릴 수 있다면,

그는 일찍이 사라진 세월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화양연화> 말미의 먼지쌓인 유리창을 깨뜨리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지막 구절은 마치 2019년의 이 소요를 예언하기라도 한듯하다. 이제 사람들은 사원 돌기둥에 남몰래 읊조리는 대신 분노에 차 외쳤다.

내가 다시 방문했던 2019년 그때, 홍콩에선 앙코르와트 돌기둥에 진흙으로 봉해있던 말들이 밖으로 터져나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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