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특별한예술마을 펴냄
결혼을 코앞에 두고 남편에게 말했다. 고모가 장애인이라고. 척추측만증이 있어 등이 굽었고, 발달장애가 있다고 얘기했다. 연애를 11년 했으니 그동안 우리 집 사정은 거의 다 알렸지만 고모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입을 연 첫 번째 이유는 결혼식에서 고모를 처음 보고 남편이 놀랄까 싶어서였다.
고모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고모를 돌보는 일은 아빠가 전담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여동생을 데리고 병원에 가고, 잠긴 화장실 문을 열어주고, 고모가 농사지은 고구마를 팔아주었다. 가끔 아빠를 통해 고모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그건 아빠의 일일 뿐, 내 일이 아니었다.
아빠는 대체로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신기할 때도 있었다. 엄마와는 자주 다퉜지만 동생인 고모와 통화할 때는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주로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 대부분인 고모의 연락을 피하지도 않았다. 아빠가 고모의 연락을 받지 않았던 때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2023년의 여름 4개월뿐이었다.
가까이에 장애인이 있음에도 나는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장애와 돌봄이 어떻게 어우러져 일상을 이루는지. ‘장애와 돌봄’이라는 주제로 주리 님이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안 뒤 책이 나오길 기다렸다. 틈틈이 올라오는 짧은 문장들을 마음에 새기며 어떤 글이 담겨 있을까 기대했다.
책 속 열 명의 저자는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느린 아이가 겁이 나 화만 냈던 엄마의 반성문(강주희), 심봉사를 비춘 사랑빛, 마담 뺑덕(김유진), 센 엄마는 명품 신발을 들고 세브에 간다(연주), 고릴라 엄마의 기우뚱 육아일기(유민), 엄마는 전투 중! 누가 먼저 항복할래?(황문선), 오지라퍼 특수교사, 나의 시선(김지화), 우리도 보통 가족(이상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뇌전증(신두란), 자신만의 속도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윤이(김은애), 최중증 발달장애인이라는 이름의 면죄부(권주리). 이들은 자신의 장애, 아이의 장애, 남편의 장애, 남동생의 장애를 비롯해 특수교사로서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해 말한다.
이들의 일상에는 어두운 면도 있고, 밝은 면도 있다. ‘장애’에만 초점을 두면 어두운 일만 그득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저 보통의 가족이다. 세 보이고 싶어 시누에게 받은 눈썹 문신이 몇 년째 짱짱하게 유지된 탓에 지인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아이와 해외여행을 간다. 자신의 김치찌개를 걱정하는 시각장애인 남편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지는 듯하고, 건강했던 둘째가 입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뒤 잘해줘야지 하는 처음의 마음가짐과 달리 너무 쫑알대는 소리에 참다가 한마디 하는 부분은 다짐과 후회를 반복하는 내 모습 같다. 장애인 형제를 둔 아이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동생의 장애를 자신이 필요할 때 요긴하게 써먹는 반석이는 여러 번 나를 웃게 했다.
장애와 돌봄은 ‘몰라서 몰랐던 이야기’라는 책의 부제처럼 내가 너무 모르고, 몰랐던 분야다. 책을 보지 않았다면 여전히 몰랐을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웅 서사처럼 장애를 ‘극복’한 기승전결이 완벽한 글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의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쓰신 열 분의 글이 여기서 끝이 아니기를 바란다. 이분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더 깊이, 더 자주 듣고 싶다.
고릴라 엄마의 기우뚱 육아일기_유민(1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