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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치 Apr 24. 2023

우리 집에는 쌈닭이 산다

아이가 유모차를 타던 시절, 주말을 맞아 남편과 동네 산책을 하고 있었다. 덩치 큰 유모차가 못마땅했던지 자전거를 타며 옆을 지나가던 아저씨가 한마디 했다. 좀 옆으로 가라고, 지나가기 힘들지 않냐고. 한창 '맘충'이라는 단어가 사회를 휩쓸던 때였다. 아이를 낳고 움츠러들었던 나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 유모차를 좀 더 가장자리로 옮기려는데 남편은 가만있지 않았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쌩하니 가는 자전거에 대고 소리쳤다.


"인도에서 자전거 타면 안 되죠!"


아저씨는 힐끗 돌아보더니 쫓아갈 듯한 남편의 기세에 서둘러 방향을 바꿔 사라졌다. 역시나 차도가 아닌 인도로.


그래, 내가 잠시 깜빡했는데 우리 집에는 쌈닭이 산다. 어디 내놔도 남부럽지 않은. 저 아저씨에게 남편이 한 말은 사실 틀리지 않았다. 내려서 끌고 가지 않는 한 자전거는 차도에서 타는 게 맞으니까. 자기는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유모차 때문에 폭이 좁아 못 간다는 소리에 고개를 숙인 내가 오히려 하지 않아도 될 사과를 했다.   


하지만 쌈닭이가 항상 정의로운 건 아니다. 그냥 웃고 넘기거나 인상 한 번 찌푸리면 될 일에도 매번 정성스레 반응한다. 우리 집 말고 다른 집에 사는 쌈닭도 몇몇 아는데 이들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남이 건들지 않으면 자기는 안 그런다"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왜냐, 남이 건든다는 기준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10점을 기준으로 내가 7에서 반응한다면 3.7이나 3.8에서 버튼이 눌리는 것 같다. 그들이 반응하는 말이나 행동 중 어디에 발끈할 포인트가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다.


사진: Unsplash의Andre Hunter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쌈닭을 보며 가족이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족은 알아보는지라 나에게는 사납지 않고(가끔 썽은 내지만), 때로는 나 대신 나서서 싸워주기도 한다. 한 지붕 아래 쌈닭이 둘일 수는 없으니 자기가 그 역할을 맡는 거라나. 가끔 “본성은 그렇지 않은데 상황이 자기를 그렇게 만든다”라는 쌈닭들 특유의 변명도 늘어놓는다.


저녁을 먹으며 무슨 이야기를 하다 남편은 예전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화가 났다. 그러고는 아이에게 ‘앵그리(angry)’라는 단어를 알려준다. 아이는 ‘암 앵구리’를 복창하며 아빠가 가르쳐주는 영어를 신나서 따라 한다. 분노가 영어 교육으로 승화된 아름다운(?) 저녁 식사였다.


다들 집에 이런 쌈닭 하나씩은 있지요?

우리 집만 있는 거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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