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니까 써야 합니다 3
글쓰기를 통해 불안을 해소하고, 나를 보호할 수 있다는 건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막막하다면 일기 쓰기를 권하고 싶다. 일기는 나를 알게 해주는 가장 원초적인 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기를 쓰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아마 대부분 초등학생 때일 것이다. 나도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일기를 썼다. 졸업할 때까지 꾸준히 일기를 쓰면서 지금도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면 처음으로 친구들과 일기를 공유해서 봤던 날이었다.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인터넷 카페를 만드시고 공개적으로 일기를 올리게 하셨다. 서로서로 더 잘 알면 좋을 거란 취지로 만드신 카페였기에 모두 기쁜 마음으로 일기를 써서 올렸다. 신기하게도 그 많은 친구 중 겹치는 이미지가 단 하나도 없었다. 게시글 제목 색깔부터 알록달록 전부 달랐고 일기 속 성격과 취향, 생각도 제각기 독창적이었다. 각자 자기만의 색이 얼마나 뚜렷한지 일기를 하나씩 읽을 때마다 해당 친구가 옆에서 읽어주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건 글을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글에서 각자 개성이 잘 묻어나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이었고, 그 친구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때 처음으로 글이란 가장 온전히 그 사람을 담는 그릇임을 깨달았다. 조금 투박해도, 크기가 작아도, 색이 균일하지 못해도 유일하단 이유만으로 모두 아름다운 글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일기를 쓴다. 별일 없이 흘러간 일상을 남기기도 하고, 감정에 방점을 찍고 내밀하게 표현하기도 하고, 복잡한 생각을 차분히 정리하기도 하면서 다양하게 일기를 쓰고 있다. 간혹 이런 나에게 어른이 되어서도 일기를 쓰다니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칭찬은 고맙지만,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일기는 어린이만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일기 쓰기는 특정 나이에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아니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나이 상관없이 쓸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일기라고 하면 초등학생 때 방학 동안 미룬 일기 쓰느라 애먹었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땐 일기가 숙제로만 취급된 지라 일기에 대한 부정적인 편향이 생긴 것이다. 어린 시절에 생긴 일기에 대한 부정적인 편향을 깨야만 나이와 상관없이 일기를 쓸 수 있다.
수년간 일기 쓰기를 멈췄다가 다시 일기를 쓰려고 들면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다. 이제 어른인데 어린이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쓰면 안 될 것 같다는 부담감이 생겨서 더 그렇다. 어린 시절부터 일기 쓰기가 버거웠던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일기 쓰기가 버거운 건 당연하다. 운동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운동을 시작하면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시작만으로 이미 절반은 한 셈이다. 한 문장씩 적어보며 부담감을 덜어내고 일기 쓰기를 습관으로 만들면 부담감은 자연스레 옅어진다. 어른이니까 무조건 더 길게 쓸 필요도, 더 진지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만 쓰면 된다.
가장 기본이 되는 일기 쓰기 방식은 말 그대로 하루를 기록하는 방법이다. 오늘 몇 시에 기상했고, 학교나 직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집에는 언제쯤 돌아왔는지 등을 차례대로 기록한다. 간혹 이런 사실 적시 일기를 두고 확진자 동선이란 다를 바가 무엇이냐고 말하기도 하던데, 어떤 식으로 일기를 써도 남는 것이 있다.
사실적으로 일기를 쓰면 좋은 점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똑같은 하루는 없단 걸 알게 된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울지도 모르겠지만, 일상을 매일 기록하다 보면 스스로 깨닫는 때가 온다. 매번 똑같은 하루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떤 날은 하루가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대로 잘 끝마쳐지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아침부터 지각해서 허둥댈 수도 있다. 또 어떤 날은 아파서 하루 전체를 누워서 보낼 수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예상치 못한 인간관계 문제로 기분이 상할 수도 있다. 이 사실을 지나치지 않고 기록한다면 결국 똑같은 하루는 없다는 걸 인지하게 된다. 따라서 매일매일을 조금 더 소중히 여길 수 있다.
둘째,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사실적으로 일상을 기록하면 내가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외적이든 내적이든 신경 써야 할 부분에 보완할 계획을 함께 기록하면 훨씬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낸다. 일기 내용이 풍성해지는 건 물론이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힘이 생긴다.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툭 던지는 말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쓴 문장대로 일상을 살아간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더 멋진 일이다.
셋째, 행복한 추억을 선명하게 담을 수 있다. 나는 그날 하루에 따라 일기 형식을 바꿔가며 쓰는 편인데, 사실 위주로 많이 담게 되는 날은 다른 사람들을 만났던 날이 많다. 보고 싶었던 친구와 만났던 날, 사랑하는 언니들과 조카들을 만났던 날처럼 특별한 만남이 있던 날은 사실을 기록하는 게 나중에 추억을 회상할 때 좋았다. 누군가와 몇 시에 만났고 어디에서 무엇을 먹었고, 어떤 풍경에 감탄하고,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해두면 사진으로만 남겨뒀을 때보다 기억과 감정이 더 선명해진다.
사실적인 일기 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고 싶다면 일상 속 한 장면을 골라서 일기에 쓴다. 오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하나를 머릿속에 띄워놓고 최대한 자세히 표현한다. 그때 상대의 표정, 말투, 행동, 나의 반응과 주변의 풍경까지 세세하게 쓸수록 더 좋다.
한 장면을 면밀하게 관찰하게 되면 좋은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표현력이 풍부해진다. 한 장면을 자세히 표현할 때 생각보다 꽤 많은 단어와 문장이 필요하다. 매번 다른 장면을 일기에 쓰다 보면 언젠가부터는 이 작업에 숙달이 되는데, 이때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표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사실적인 표현에서 창의적인 표현으로 확장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부터 일기는 단순한 일상 기록을 넘어서 독특한 작품이 된다.
둘째, 세상을 보는 나만의 시선이 생긴다. 시시한 일상은 없다. 내가 포착해서 문장으로 표현하고 기록하면 모두 소중한 기억이 된다. 그 기억에 의미를 붙이는 건 오로지 나만 할 수 있다. 일상을 포착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힘이 생기면 그때부터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남들이 별거 아니라며 지나치는 자연 풍경과 사소한 일상마저도 달리 보인다. 일기를 쓰는 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나를 바꾸는 일이다. 내가 달라지면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남들과 다른 특별한 철학도 만들 수 있다.
5년째 꾸준히 일기를 쓰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조금 끼치게 됐다. 나를 따라서 다이어리를 구매했다며 연락이 오는 경우가 종종 생긴 것이다. 그들의 시작이 반가웠고, 함께 기록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길 나눌 수 있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부분 중도 하차를 하고 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들이 기록을 멈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습관 만들기가 어려워서. 습관 만들기는 누구나 어렵다.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단계가 찾아오기 전까지 의식적으로 계획하고 움직일 기간이 필요하다. 이럴 땐 의식적으로라도 일기를 쓸 수밖에 없는 여건을 한 가지라도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 나는 처음 다이어리를 펼칠 때 여백이 많은 것이 싫었다.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다이어리여야 손이 자주 갈 것 같아서 주말마다 미리 한 페이지 전체를 원하는 컨셉으로 통일성 있게 꾸몄다. 계절에 따라서 정원, 바다, 캠핑 컨셉으로 꾸미거나 기념일을 떠올리며 생일, 크리스마스, 축제와 같은 컨셉으로 꾸미기도 했다. 페이지마다 다른 장면이 펼쳐지니까 꼭 내 손으로 만든 동화책을 읽는 것만 같았다. 그때부터는 다음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 계속 일기를 썼고, 일기 쓰기를 습관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처럼 내가 일기를 쓸 때 어떤 점을 버거워하는지 파악하고 해결하면 습관 만들기가 더 쉬워진다. 내가 보상심리가 있는 사람이라면 루틴 어플을 활용해서 일기 쓴 날을 체크하고 나에게 선물을 주거나 맛있는 음식 사 먹기. 혼자서 하는 게 어렵다면 친구들에게 함께 하자고 해서 매일 일기 인증샷 공유하기처럼 해결 방법은 다양하다. 일기를 쓰기 어렵게 만드는 걸림돌을 치우고 나면 그 뒤엔 의식하지 않아도 쓰게 된다.
기록을 멈춘 이유 둘째. 똑같은 일상을 계속 기록하는 것이 싫어서. 대부분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생활패턴이 똑같고, 주말에 생활패턴이 조금씩 달라지는 일상을 살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똑같은 하루란 존재하지 않는다. 생활패턴만 똑같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부 다른 하루다. 나는 학부생 시절과 직장인 시절 내내 기차를 타고 다녔다. 도합 7년간 매일 같이 기차를 탄 셈이다. 다시 돌이켜봐도 그 시간이 마냥 고통스럽진 않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고, 기차 안에서 다양한 군상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역에 도달하기까지 읽는 책이 매번 달랐고, 매년 나를 살게 하는 가치관 또한 달랐다. 그렇다면 과연 내가 살아왔던 나날이 똑같은 나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사는 게 너무 팍팍하고, 웃을 일 하나 없으니까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다는 말로 퉁 쳤을 뿐이다. 나라고 왜 힘들지 않았던 순간이 없을까. 새벽 기차 타야 하는데 콜택시가 날 버려두고 간 적도 있고, 매일 출근하기 너무 지치고 고돼서 주말마다 운 적도 있으며, 번아웃이 와서 멍하게 보낸 시간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떠올렸다. 생활패턴이 똑같은 일상이 일주일 중 5일이나 되고, 한 달 중 20여 일이나 된다. 그 많은 시간동안 논 것도 아니고 울면서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이 땅에 사는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나날들은 똑같다는 말로 정리해선 안 된다. 열심히 살았다는 말로 정리해야 한다. 나도,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똑같은 하루를 살지 않았다. 열심히 살았고, 어제와 다른 소중한 오늘을 살았다. 그러니, 오늘을 기록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일기 쓰기를 통해 나의 일상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