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니까 써야 합니다 4
몇 년 전에 일하던 도중 갑자기 숨이 안 쉬어질 정도로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다. 당시 마감 직전에 겨우 병원에 도착해서 진료를 받았다. 의사 선생님께서 나에게, “위경련입니다. 최근에 스트레스받은 일 있으세요?”하고 물었다. 스트레스받은 일은 없다고 답하고, 약을 처방받은 뒤에 퇴근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뒤에 깨달았다. 사실 번아웃이 온 상태였는데 힘들지 않은 척했다는 걸.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감정 표현에 인색하다. 슬픈데 울지 않고 버티고, 화가 나는데도 꾹 참는다. 이렇게 버티기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우울한데도 계속 웃고, 죽을 것 같은데도 다들 이러고 산다는 말로 감정을 외면하는 이들도 많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나약함의 상징이라고만 여기는 사회 분위기로 인해 일어난 현상이다. 심지어 감정의 문제를 성취의 문제라고 굳게 믿어서 내면에 감정 응어리는 그대로 둔 채, 성취와 관련된 단어에 집착한다. 학벌, 연봉, 직장 등이란 단어는 그렇게 우리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다. 결국, 사회 경쟁은 갈수록 더 심해지고, 나를 외면한 만큼 내면의 고통은 더 깊어지며, 감정을 내색하기는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고 만다. 어른이 되면 조금 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세상을 살게 될 줄 알았건만, 왜 우리는 나를 속이는 일에만 열성적인 어른들로 자라났을까. 어린 시절의 나는 이렇게 아픈 어른으로 자라길 원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성취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적절한 성취는 삶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한 성취욕은 결국에 나를 해친다. 성취에 내 인생의 성공 여부를 걸면 일상이 피폐해진다는 뜻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선 응어리진 감정을 올바르게 해소하는 법부터 알아야 한다. 이럴 때 꾸준히 감정을 들여다보고 글로 쓰는 작업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도 번아웃이 왔던 해 마지막 달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쓰고 있다. 일기를 통해서 내 감정을 잘 들여다보게 됐고,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따라서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위해 감정 해소를 위한 일기 쓰기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사회가 갈수록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무엇이든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건너가면서 대중가요 길이는 2분대로 짧아졌고, 호흡이 긴 영상에서 1분 내로 볼 수 있는 숏츠 영상으로 유행이 넘어갔다. 언어도 이런 사회의 흐름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줄임말 사용이 늘었고, 긴 글은 읽기 힘들다며 세 줄 요약해달라는 요청을 쉽게 건네는 상황에 이르렀다. 난 작금의 우리 사회를 휘발성 사회라고 생각한다. 활자를 눈으로 읽고,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에 담는 인내의 과정이 사라졌다. 영상을 눈으로 한 번 보고 옆으로 휙 넘기고 잊어버린다. 오래 곱씹은 것이 없으니 당연히 머릿속에 남는 것은 없고, 머릿속에 남는 게 없으니 언어로 내뱉긴 어려워졌다. 이런 식으로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 표현력의 부재가 오고 감정 해소도 덩달아 어려워진다. 생각을 휘발시키지 말고 기록으로 표현하고 남겨야 한다. 그래야 어지러운 사회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일기 쓰기를 통해 감정을 잘 해소하려면 문장을 구체적으로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 모든 일이 짜증난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런 식으로 뭉뚱그려서 쓰면 비관적인 생각만 커지므로 오늘 있었던 불쾌한 경험을 자세하게 쓰고 그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써야 한다. 화난다, 역겹다, 슬프다, 무섭다, 겁났다, 외롭다 등 감정을 명확히 쓰는 것이 중요하다.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못하다면 국어사전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예를 들어서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을 좀 더 다양하게 표현하고 싶다면 두렵다라는 형용사를 검색해본다. 국어사전을 통해 두렵다의 유의어를 다양하게 알 수 있다. 염려스럽다, 걱정스럽다, 근심스럽다, 불안하다 등 두렵다의 다양한 유의어를 살피고 내 감정과 맞는 표현을 골라서 쓴다. 한국 사회는 감정을 표출하기보단 억누르고 감추는 걸 미덕으로 여기기 때문에 당연히 감정 표현에 미숙할 수밖에 없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내 감정을 끝까지 숨기고 평생 모르는 채 사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다.
감정을 풀어쓰는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면, 그 감정이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살펴본다. 단순하게 상대방이 잘못을 저질러서 화가 났을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을 들여다보면 내가 여유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오해일 수도 있고, 평소 미워했던 감정이 화풀이처럼 나온 걸 수도 있고, 소통이 필요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표면적으로 크게 와닿은 감정을 살피되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킨 원인도 살펴본다면 감정 해소에 훨씬 도움이 된다.
나도 감정 쓰기에 능숙하지 못하던 시절엔 남 탓이 편했다. 저 사람 인성이 엉망이라서, 화법이 별로라서,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등 남 탓하는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감정 쓰기를 지속적으로 하고 난 뒤엔 생각이 달라졌다. 나의 미숙함이 원인이었던 적도 많았단 걸 깨달았다. 나의 불완전함을 인지하면 자기혐오가 더 심해질 줄 알았는데, 자기혐오는커녕 나를 더 잘 알게 됐다. 나는 어떤 말에 감정적으로 크게 반응하는지, 불쑥 올라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길러졌다.
물론, 이 단계까지 가는 건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남 탓을 하지 말고 내 탓을 하라는 뜻도 아니다. 나에게도 수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큰 상처를 준 사람이 있고, 인생의 반면교사로 삼은 못된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제외하고 작은 갈등부터 살펴보자는 의미다. 내 안에 쌓인 불안, 슬픔, 자기혐오, 공허함이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적은 없는지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면 감정을 훨씬 더 잘 다스릴 수 있다.
만약 부정적인 감정이 마구 분출되기만 하고 모든 게 밉기만 하다면, 감정대로 마구 써보는 걸 권한다. 감정에 압도됐을 땐 원망할 대상을 찾고, 분풀이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그걸 글로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마음이 누그러지는 나날이 반복되면 그때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도 절대 늦지 않다. 감정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어서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화가 나면 화가 난 것이고, 내가 외롭다면 외로운 것이고, 내가 두렵다면 두려운 것이다. 남에게 내가 지금 화를 내도 되는지, 기분이 나빠도 되는지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 일기에 감정을 쓰는 건 내 감정을 스스로 헤아리기 위함이다. 내 감정의 주체는 나라는 사실만 알고 있어도 충분하다.
일기를 감정적으로 쓸 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걱정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부정적인 표현이 너무 많아서 이 감정들에 압도될까 봐 두렵다는 것이다. 감정을 쓰면서도 불쾌하고, 훗날에 다시 들춰보기도 싫고,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다면 당신은 아주 잘 쓰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감정에도 끝이 있다. 단, 감정이 고갈되려면 쥐어짜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소비해야 한다. 쉽게 예를 들자면 세탁기를 떠올려보자. 만약에 세탁기에 탈수 기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빨랫감을 치덕치덕 건조대에 올려야 할 것이다. 몇 날 며칠이 지나도 빨랫감은 잘 마르지 않고, 습기를 머금어 쿰쿰한 냄새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쓰는 세탁기엔 탈수 기능이 있다. 탈수 기능이 물기를 최대한 짜준 덕에 빨랫감은 하루만 널어놔도 뽀송뽀송하게 잘 마른다. 일기에 부정적인 감정을 쓰는 일은 세탁기의 탈수 기능과 동일하다. 부정적인 감정을 모조리 쏟아부어서 더 이상 물기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탈탈 털어야 한다. 그래야 희미해진 부정적인 감정을 햇볕에 잘 말릴 수 있다.
이런 글을 쓰는 나조차도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매 순간 감정을 잘 다스리진 못하지만, 평생 내 감정을 잘 들여다보고 돌봐주겠다는 각오로 감정 일기를 쓴다. 나는 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 때 감정 일기를 쓴다. 여기서 자기혐오까지 짙어지는 순간엔 심연의 밑바닥까지 내려간다. 평소에 비관적인 말은 잘 쓰지 않으려 하지만, 내가 싫어서 견딜 수 없을 땐 표현을 정제하지 않고 거침없이 휘갈겨 쓴다. 그 문장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나밖에 없으니 마음이 가는 대로 쓴다. 마음이 가는 대로 쓰게 되면 솔직하게 쓸 수밖에 없다. 솔직함은 나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인정할 수 있게 도와준다. 직면과 인정을 통한 자유로움은 결국에 나를 해방시킨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불안도, 자유로움도 결국에 근본적으론 불확실성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미래가 불확실한 건 두 관점 모두 변함없다. 그러나 전자는 불확실성을 걱정했고, 후자는 불확실성을 인정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걱정과 인정은 다르다. 걱정은 뜬구름처럼 머릿속을 맴도는 잡념을 방치하는 것이고, 인정은 떠다니는 잡념을 붙잡아서 활자로 옮기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고,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글로 쓰면 박제가 된다. 박제가 된 감정은 나를 더 길게 괴롭히지 못한다. 불확실성을 눈에 보이는 영역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만이 부정적인 감정과 조금 더 빨리 멀어질 수 있다.
삶은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갑자기 헤어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고, 답답한 상황이 수년째 이어지기도 한다. 이럴 땐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억지로 갖는 것보다 꽤 부정적일지라도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게 더 도움이 된다. 부정적인 감정은 외면할수록 무의식의 영역에서 점점 몸집을 불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서 나를 뭉갤 수 있기 때문이다. 일기 쓰기를 통해 나를 속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감정은 크게 자라지 못한다. 역으로 나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자란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도 30여 년을 살아오면서 별별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사는 게 이렇게나 힘든데 웃을 일 하나 만들어주지 않는 하늘이 원망스러웠고, 매번 불안에 떠는 내가 미웠다. 기쁨보다는 고통에 무게 추가 실린 일상을 살면서 자존감이 떨어지고, 에너지는 수년간 안으로만 순환했다. 에너지는 돌고 돌아서 생각의 원천이 됐고, 결과적으로 생각을 글로 옮기는 현재에 이르렀다. 일기장에 나를 중심에 둔 수많은 문장을 채우면서 깨달았다. 글쓰기는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자들의 특권이란 것을. 기나긴 인고의 시간 끝에 내게 주어진 건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는 힘이었단 걸 이제는 안다.
일기가 인생에 뭐가 그리 큰 도움이 되겠냐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살린다. 과거의 나는 일기를 통해 미래의 나에게 응원 편지를 써두었고, 희망으로 이루어진 일기도 남겼으며, 당시 어려움을 이겨내고 한 단계 성장한 나를 보여주었다. 지난 일기장을 읽으면서 나도 몇 번이고 삶의 고비를 넘겼다. 다른 사람들도 삶에 지칠 때 외부적인 환경이나 타인이 아니라 나에게서 위안을 얻고, 앞으로 나아가는 경험을 꼭 해봤으면 좋겠다. 성취를 이룬 인생은 멋지지만, 마음을 돌본 인생은 아름답다. 아름답게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아지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