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9 Budapest
1월 19일,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이틀 전, 아침을 맞이했다.
유럽에 들어와서 2박,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4박. 부다페스트에서의 시간이 무궁무진할 줄만 알았는데, 이제 이틀만 남아 있다니! 슬슬 나와 아내도 압박을 느끼는 듯싶다. 어젯밤엔 아이들을 재우고 난 후 어디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어야 할지 한참을 검색했다. 실제 상업용 스냅사진들을 찾아보면서 사진 찍는 장소를 찾아보았고, 남은 시간 동안 우리 집 거실에 걸어둘 만한 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일정을 시작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다. 밤새 너무 추워 가족 모두 또 잠을 설쳤다. 아이들이 또다시 아프기라도 할까 걱정이 됐고, 남은 이틀 호텔을 잡기로 결정했다. 그래 우리 여행이 이렇게 순탄할 리가 없지. 갑자기 20만 원이 넘는 돈을 더 써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대신 우리 스스로 합리화하는 과정은 조금 필요하다. 애초에 호텔에서 4박을 한 거라고 생각하면, 그 돈이 그 돈 아닌가. 참으로 구차하지만, 마음에 안정을 위해선 이렇게라도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 게다가 호텔에서 자더라도 이 집에 와서 저녁을 해 먹을 수 있으니 그건 오히려 이득일 수도 있다. 결국 처음 갔던 호텔을 예약하고 나니, 마음이 평안하다. 마음이 평안해지니, 마치 부다페스트의 기온이 몇 도는 올라간 듯 몸도 따뜻해진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오늘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날씨. 분명 부다페스트에 처음 왔을 때 첫 이틀은 매우 화창하고 좋은 날씨였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사진을 더 찍었어야 했는데. 역시 여행에서 할 일을 미루면 안 되는 것일까. 날씨에 대한 아쉬움 한가득.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우린 한시라도 빨리 세현이 장난감 과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다른 쇼핑몰부터 들르기로 결정. 목적지는 코빈이라는 이름의 쇼핑몰(Corvin Plaza Bevásárlóközpont)이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교통편이 마땅치는 않아 힘들게 도착. 하지만 여기서도 브리오 기차는 구할 수가 없었다. 아, 대체 이게 뭐라고 우리를 이렇게까지 힘들게 만드는 걸까. 세현이는 또 실망한 눈치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또 다른 쇼핑몰로 이동하기로 결정. 언제쯤 장난감을 해결하고, 부다페스트 구경을 할 수 있는 건지 이제는 반 포기 상태이다.
점심 식사로 바로 옆 일식집을 가기로 했다. 양식은 질릴 대로 질린 느낌이다. Cinema Sushi Bár라는 이름의 특이한 일식집인데, 막상 들어가서 보니 주인은 일본인이 아니고 중국말을 쓰고 있었다. 갑자기 중국 스타일의 초밥이 나올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김초밥과 연어 초밥 세트, 면 등을 주문했고, 면이 홍콩 스타일이긴 했지만 가족 모두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칠 무렵 다음 쇼핑몰을 검색한다. 이쯤 되니 아마 어디에서도 BRIO 기차를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없다. 이러다 부다페스트 온 쇼핑몰을 다 찾아갈 기세다. 이번엔 강을 건너가 보기로 한다. 부다 지구 우리가 묵을 호텔 인근에 Mammut라는 이름의 쇼핑몰을 찾았다. 시간은 조금 오래 걸리지만, 오늘 저녁에 어부의 요새를 가서 사진을 찍기로 했기 때문에 쇼핑몰에 들렀다 가면 되겠다. 트램을 타고 이동하는 25분의 시간. 아이들도, 아내와 나도 한껏 지쳤다. 확실히 습하고 추우니 더 빨리 지친다.
쇼핑몰에 도착하자마자 여지없이 장난감 상점으로 직행한다. 이 쇼핑몰에도 어제 갔었던 REGIO JÁTÉK라는 장난감 가게가 있었다. 사실 어제 더 큰 쇼핑몰에 갔다가 허탕을 쳤기 때문에, 전혀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속으로 세현이를 어떻게 또 설득해야 할까 고민하며 장난감 가게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게 웬일, 드디어 BRIO 기차를 발견했다. 가격도 국내에서보다 훨씬 저렴하다. 세현이는 잔뜩 부푼 마음으로 브리오 기차가 있는 코너를 한동안 관찰하기 시작했다. 원래 사려고 했던 모델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세현이가 좋아하는 연두, 초록색 기차를 '드디어' 구할 수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항상 마음을 비워야 하는 건가 보다.
목표를 달성하고, 이제 아이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잘 자고 일어나면 장난감을 뜯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아이들이 자는 동안 쇼핑몰에서 시간을 좀 더 보내다 해가 질 무렵 어부의 요새 방면으로 올라갈 요량이었다. 기분이 좋았는지 아이들은 금세 눈을 감았고, 우리는 계획한 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후 4시 30분. 벌써 해가 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급하게 어부의 요새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올라온다. 다행히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날이 흐려 걱정했는데, 해가 지기 시작한 어부의 요새와 마차슈 성당(Mátyás Templom) 인근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사진에서만 보던 그 풍경 그대로. 아니 사실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다. 어제오늘 구경하지 못한 파란 하늘을 해가 지는 이 시간에 볼 수 있다는 게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가족사진을 찍기에 완벽한 환경. 우린 더 늦기 전에 아이들을 깨웠다. 깨우지 않았다면 더 오래 잤을 법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날씨가 좋을 때 사진을 남겨야지. 잠에서 막 깬 아이들을 유모차에서 내리게 하고, 마구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이래서 부다페스트 야경을 그렇게나 찾아오는 것일까. 어부의 요새 아치 사이로 보이는 강 건너 국회의사당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사실 겨울 유럽여행은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하루가 짧은 게 단점이긴 하다. 하지만 아이들과 여행에서 오후 5시에 이렇게나 멋진 야경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은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여름이었다면 9시나 되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젊은 나이에 혼자 왔다면 당연히 더 늦은 시간 와서 구경해도 전혀 문제 될 게 없겠지만, 지금은 이 편이 낫다. 아이들도 생각보다 사진 촬영에 협조를 잘해준다. 녀석들도 멋진 풍경을 알아본 걸까. 사진이 찍고 싶었나 보다.
사진 찍기를 마무리하고, 이번엔 세체니 다리 방면으로 내려왔다. 다리를 건너 다시 페스트 지구. 사실 인터넷에서 찾았을 땐 세체니 다리를 배경으로 참 멋진 사진이 많이 있었는데, 어디에서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곳엔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우린 저녁 식사를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저녁 메뉴는 바로 삼겹살 구이. 요 며칠 아이들이 입맛이 없어 보여서 걱정했었다. 야심 차게 삼겹살을 준비. 한인마트를 들러 김치까지 구입해서 집으로 들어왔다. 저녁을 집에서 먹고 호텔로 짐을 챙겨 가기로 했다.
유럽에 와 고기를 구워 먹을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맛이 괜찮다. 꼭 국내 돼지고기랑 직접적인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유럽에서 먹는 삼겹살 구이는 정말로 별미 중에 별미다. 아마 가격까지 저렴해서 더 그렇겠지. 오랜만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배를 채웠다. 고기도, 함께 구운 감자도, 야채와 김치까지도. 최상의 조합이었다.
너무 맛있게 먹은 나머지, 아내와 내일 저녁은 다른 여행객들을 초대해서 함께 먹어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4년 뮌스터에서 아내와 지낼 때, 당시 유학생 집에 초대받아서 삼겹살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친구들의 친절과 맛있는 식사를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여기 부다페스트에서 여행하고 있는 젊은 친구들에게 이 맛있는 삼겹살을 먹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 생각이 또 흐지부지 될까 봐, 내일 오전에 꼭 유명한 네이버 유럽여행 카페에 초대하는 글을 올리기로 했다.
저녁 만찬을 마무리하고, 우리는 짐을 챙겨 호텔로 향했다. 짐을 챙겨 이동하는 길이 만만치 않았지만, 따듯하게 잘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마음은 편하다. 호텔에 들어가 체크인하고 방에 들어오니 밤 9시가 되었다. 우린 내일 부다페스트에서의 마지막 날을 부지런히 보낼 심산에서 아이들을 일찍 재우기로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시 호텔로 돌아와 즐거운지 한참 동안을 떠들며 잘 생각을 안 한다. 시계는 10시를 넘긴 지 오래다. 이 녀석들이 왜인지 설득을 해도, 성질을 부려도 절대 안 자려고 한다. 이제 나와 아내의 인내심도 슬슬 한계점에 다다랐다. 결국, 아내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 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아이들에겐 너희들이 자야 엄마가 돌아온다고,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했다. 아이들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가, 진짜 엄마가 안 오자 슬슬 불안해하며 울기 시작한다. 나는 마치 군대의 교관이 된 것 마냥, 너희들이 자야지 엄마가 돌아온다며 아이들에게 외치고 있다.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요청하지만, 이제 와서 노래를 불러주기엔 상황이 맞지 않다고 느껴진다.
그렇게 10분이 흘렀을까. 정말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두 녀석 눈엔 눈물이 고여 있고, 둘은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세현이가 동생을 위해 자장가를 불러주더니 곧 둘이 잠이 든 것이다. 이게 뭐 특별한 일이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 가족에겐 그동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들끼리 밤에 잠을 잔다고? 나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았고,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아내에게 연락해 알렸다. 방 앞에서 기다리던 아내도 바로 방 안에 들어와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지난번 말라가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던 형제가 떠올랐다. 그때 위기의 상황에서 동생을 챙기는 형의 모습을 보며, 우리 세현이도 그런 형이 될 수 있을까 궁금했었다. 그리고 오늘 (아마 이 녀석들에게는 꽤나 위기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형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모습을 보니 너무 대견하다. 시간이 지나 생각하면 부다페스트 그 작은 호텔방 안에서 대체 뭐하고들 있었던 건지 웃으며 이야기하겠지만, 우리 가족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그런 일이 오늘 벌어졌다.
아이들끼리 잠든 덕분에, 아내와 잘 준비를 하고 금방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내일이면 정말 부다페스트의 마지막. 이 귀여운 녀석들이 내일까지 잘 버텨주길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