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물킴 Nov 23. 2020

지랄엔 지랄로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도저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순간들이 오곤 했다. 억울하고 분한 상황, 성격이 괴팍한 상사, 불합리한 인사조치 등 그것은 매우 다양하고 반복적인 형태였는데, '과연 이 괴로움을 언제까지 어떤 마음으로 참아내는 것이 정답인가'하는 고민은 나에게 꽤 심각한 주제였다. 믿는 선배, 동료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고민을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조언은 보통,


네가 참아. 참는 사람이 결국 이겨. 똑같은 사람이 되지 마.


종류의 대답들이었다. 대체로 나는 그 조언대로 행동했고, 그것이 10에 9는 맞다고 생각하지만. 즉, 10에 1번 정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정답이 아닌 것 같은데' 싶은 때도 있었다.


10여 년간의 직장생활을 통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는 '지랄엔 지랄로'를 10에 1번 정도의 상황에서 사용하는 정규 행동양식으로 정립하였다. 이 행동양식을 온전하게 발동하기 위해 내가 확인한 바로는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이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행동양식을 발동시킬 경우, 반대로 내가 곤란한 상황도 자주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 지랄엔 지랄로?



1.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상대방의 과실이 100%여야 한다.

10%도, 1%도 안된다. 내 과실이 0%일 때 사용을 검토할 수 있다. 제 3자가 현재의 상황을 전혀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는 누군가에게 옮긴다 해도, 나의 과실은 깔끔히 0%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둘 다 똑같은 놈 소리 듣기가 십상이다. 내가 하급자일 경우에는 그 소리를 듣기가 더욱 쉽다.



2. 업무적으로 안정적인 성과를 증명한 단계여야 한다.

과실이 0%라 하더라도, 현재의 직장에서 아직 나의 퍼포먼스가 증명되지 않은 타이밍에 사용하면 안 된다. 즉 선배, 동료, 후배 등 다양한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들어봐도 나의 퍼포먼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어야 한다. 결국 회사는 '일을 위해 모인 공간'이기 때문에, 업무적으로 보여줄 것이 명확한 사람의 존재감과 보이스에 대해서는 주목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일 경우 그 목소리의 힘이 더욱 커질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내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억울하더라도, 나의 말이 맞다고 공감해주고 지지해줄 커뮤니티가 없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조직 내 갈등의 상황에서 나에게 동조를 한다는 것은, 친밀도와 상관이 없다. 본인의 직장생활에 해가 되는 상황이라면, 결코 공개적인 지지를 쉽게 해 줄 동료는 없을 것이다. 회사생활은 정의감으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한 번에, 확실히 해야 한다.

우물쭈물해서는 안된다. 단호하고 명확한 태도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단번에 해야 한다. 주저함이 보였다간 무시당하기 쉽고, 어색해 보였다간 역공을 받기 쉽다. 하고 싶은 말을 잘 정리해, 확실하고 임팩트 있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4. 합리적인 옵션을 제시해야 한다.

감정의 배설로 끝나서는 안된다. 지랄로 응수하되, 그 끝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합리적인 제안이 있어야 한다. '이 갈등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과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무엇이다. 선택하라. 나는 이것을 선택할 예정이다.' 등으로 상황을 리드해야 한다. 단순히 감정을 배설하고 끝날 경우, 정말로 '지랄 맞은 애' 이미지만 얻고, 갈등의 해결은 얻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목표는 지금 겪고 있는 힘든 상황을 해결 또는 개선하는 것에 두어야 한다. 



5. 관계가 회복되지 않을 가능성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최후의 수단에 가까운 방법임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극단적인 방법은 효과가 빠르기도 하지만, 호불호를 가지기도 한다. 행동에 따른 결과(관계에 주는 영향, 조직에 주는 영향 등)를 내가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도 다져두는 것이 좋다.



6. 자주 쓸 경우 맞는 말도 맞는 게 아니게 된다.

이것은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많은 방법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모든 갈등을, 매번 이 방식으로 해결하려 들면 안 된다. 쉽고 즉결처분이 가능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자극적이고 부작용도 큰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 더 나은 갈등의 해결 방법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극단적인 방법은 임팩트가 강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고, 이것은 직장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나의 이미지 메이킹과 구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이 10에 1인 상황이 올바른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마주한 상황이 과연 '10에 1'인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유보하며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아닐 것이라고, 다른 해결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달래 보아도 결국 이것이 10에 1인 상황이 맞다는 최종 판단이 든다면 한번쯤 고민을 해보자.


"역시, 지랄엔 지랄인가."
이전 05화 회사원은 생산자가 될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