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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하 Feb 11. 2024

드디어 종묘를 가다 <상>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무슨 한시와도 같은 이 글은 학창 시절부터 달달 외웠던 조선시대 왕들의 이름입니다. 역시 기억은 어린 시절 각인된 것이 가장 선명해 수십 년 전에 입력된 이 왕들은 지금도 단번에 암기되어 일필휘지로 써졌습니다. 그 이전 왕조인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의 왕들은 기껏 나라를 건국한 시조와 위인의 반열에 오를 정도의 유명한 왕들만을 기억하면서 조선시대 왕들은 이렇게 운을 맞추어 모든 왕을 외울 정도로 우리는 배웠습니다. 아무래도 조선은 우리 대한민국과 가장 가까운 역사의 왕조였기에 오늘날까지도 그 이전 왕조들보다 많은 영향을 받고 있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실제로 국사 책에서도 다른 왕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페이지를 차지했습니다. 이렇게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1392년 고려를 없애고 나라를 세운 후 순종이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뺏기기까지 27명의 왕이 518년간 왕조를 이어갔습니다. 물론 그 안엔 1897년 선포한 대한제국의 역사도 13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겨울은 맹추위도 빈번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포근한 날씨도 길게 이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흡사 과거에 우리나라 겨울 날씨를 정의했던 삼한사온(三寒四溫)을 떠올리게 합니다. 국사 책에서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웠던 시절 국토지리 책에선 삼한사온이 나왔습니다. 지난 1월 마지막 주에도 그렇게 포근한 날씨가 이어졌는데 월요일부터 점심약속이 있었던 저는 종로3가를 나갔습니다. 그곳엔 저도 그렇고 만나기로 한 지인도 아무 연고가 없지만 서로 지하철을 갈아타지 않고도 한 번에 갈 수 있는 중간 지점의 역을 검색하다가 그곳이 당첨된 것입니다.


제 기억 속에 종로3가역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입 사원 때부터 숱하게 1호선과 3호선을 이용하며 환승을 위해 지하에서만 오갔지 그 역을 빠져나와 바깥공기까지 쐬게 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점심 장소는 제가 인터넷으로 역 주변 맛집 검색을 통해서 예약을 한 호기심이 발동한 어떤 식당이었습니다. 당연히 '00옥' 등 이런 이름의 한식집들이 뜰 줄 알았는데 이름도 생경한 '순라'가 들어간 이탈리안 식당이 보여 예약을 한 것입니다. 기와가 얹힌 한옥 레스토랑입니다.


그런데 그 동네엔 그런 구조의 식당과 카페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요즘 서울에서 뜨는 동네라고 합니다. 일단 저는 종로3가역 주변에 이 글의 주제인 종묘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종묘를 둘러싼 성벽길을 순라길이라고 부르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정확히 그 동네의 길은 서순라길입니다. 그렇게 전통적인 자원에 현대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사람들이 몰려드는 핫한 동네가 된 것입니다. 그 길 건너 익선동 한옥거리처럼 말입니다. 제가 태생이 서울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울로 대학을 다니고 결혼 즈음부터 30여 년을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이런 첫 발견과 첫 인지는 반가움을 떠나 저를 당혹스럽게 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종묘를 한 번도 안 가보다니.. 아니 그 이전에 종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니.. 이건 당혹감을 넘어서 살짝 이해가 안 되기도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숱하게 외워 머릿속에 박혀버린 태정태세문단세부터 정순헌철고순이 다 집합해 있는 종묘인데 말입니다.


종묘 돌담을 끼고 조성된 어느 가을날의 서순라길 (출처, 서울관광재단)


순라길에 위치한 한옥의 운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한정식이 아닌 파스타와 피자를 먹고, 역시 또 근처 한옥 카페에서 전통차가 아닌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그 점심 약속은 종료되었습니다. 순라길은 말 그대로 조선시대 포졸들이 야간에 궁중과 도성 둘레의 경계를 위해 순찰을 돌던 길이었습니다. 지난 20세기 말 치안이 부실했던 시절 야간에 2인 1조로 각 동네를 순찰했던 방범대원을 떠올리게 하는 순라길입니다. 지금 이 순라길은 역사문화탐방로로 지정되어 국내외의 많은 방문객들을 맞고 있습니다. 궁궐처럼 보이는 종묘를 끼고 있어 순라길의 매력도가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덕수궁을 끼고도는 돌담길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길도 넓어지고 밤에도 훤하므로 과거처럼 순라군이 돌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종묘에 입장을 하게 됩니다. 약속으로 종로3가를 가게 되었고 순라길에서 식사와 티타임을 가지니 자연스레 그 옆에 있는 종묘를 가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날씨도 포근했으니 겨울 산책으로도 그만인 날이었습니다. 사실 종묘는 그날 그 자리에 저와 동행한 선배께서 권해서 함께 간 것이었습니다. 점심 약속을 한 상대편 손님을 보내고 함께 종묘로 향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날 그 선배가 없었다면 저의 종묘행은 더 미뤄졌을지도 모릅니다. 애당초 그 근처에 종묘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그 선배였으니까요.


저보다 9년 연상인 그 선배는 서울에서 주욱 자랐음에도 그때까지 종묘를 딱 한 번밖에 안 가봤다며 저보다도 더 그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어하였습니다. 한 번도 안 가본 제가 더 무색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 다 무조건 가야 한다며 입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입장료로 천원을 냈는데 이런 유적지가 국제 시세로 1달러도 안 되는 것에 놀랐습니다. 게다가 동행한 선배는 경로우대로 프리패스였습니다. 물론 선배는 전후 이동 수단이었던 지하철도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입니다.


숲속에 아늑하게 파묻혀 신령해 보이는 종묘 (출처, 문화재청)


조선의 건국 세력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오늘날 서울로 남하하였습니다. 1394년 천도를 하며 그들이 가장 먼저 건축을 한 것이 경복궁, 종묘, 사직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년 후인 태조 4년인 1395년 종묘는 1차적으로 완성이 되었습니다. 1차적이라 한 것은 이후 계속해서 중축을 해서 그렇습니다. 왕조가 몇 대까지 갈지 몰랐기에 사전에 마스터 건축물을 지을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왕들이 죽어서 방이 차서 만원이 되면 방을 늘리는 방식으로 증축을 해갔습니다. 최종적으로 고종 때 19개의 방으로 마감이 되어 종묘는 오늘날의 모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마지막 증축자인 고종은 그가 죽어서 들어갈 방과 아들인 순종의 방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해서 순종 이후 왕이 없어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조선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지금 현재의 19개 방에서 몇 개가 더 늘어났을지 모릅니다. 이것은 뒤에 상세히 설명될 종묘의 본채인 정전에 위치한 방의 수입니다.


종묘(宗廟)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모아놓은 왕실의 사당입니다. 그렇듯이 종묘의 묘는 무덤을 뜻하는 묘(墓)가 아니라 사당을 뜻하는 묘(廟)입니다. 으뜸인 종()은 임금을 칭합니다. 사당인 묘엔 사자의 혼백(soul)이 고 무덤인 묘엔 사자의 육체(body)가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지위의 왕의 무덤은 높은 곳에 위치해서인지 묘()가 아니라 릉()이라고 부릅니다. 그 무덤 앞에서 기일과 명절에 각각 드리는 제사는 종묘에서의 제사와는 별개입니다. 종묘의 제사는 왕들의 연합 제사인 국가 의식이기에 그렇습니다. 종묘에서 치르는 제사라 종묘제례(禮)라 부릅니다. 또는 큰 제사라 종묘대제(宗廟大祭)라고도 불립니다. 그리고 그 제사동원되는 음악과 무용을 통칭해서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라 부릅니다.


신주(神主)는 밤나무로 만든 길쭉한 위패입니다. 본래 혼백은 형체가 없으니 그것을 형상화시킨 것이 신주입니다. 놀라운 것은 현재 종묘에 있는 역대 모든 왕들의 신주는 그들이 죽었을 당시 만들어진 진품이라고 합니다. 종묘가 만들어진 1395년부터 따지면 최초 입주자의 신주는 6백 년이나 넘게 보관되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선조가 의주로 도망가면서도 이 신주들을 다 싸갈 정도로 신주는 귀하게 받들어졌습니다. "신줏단지 모시듯"이란 말이 괜한 말이 아닌 것입니다. 신줏단지는 말 그대로 평소에 신주를 담아놓은 항아리나 바구니를 가리킵니다.  


종묘의 본채라 할 수 있는 정전의 입구와 외곽 모습


사직(稷)은 토지의 신(社)과 곡물의 신()을 가리킵니다. 조선 왕실은 도성인 경복궁을 기준으로 동쪽인 좌편엔 종묘를 두고 서쪽인 우편엔 사직을 두어 조상과 신들을 받들고 그들의 보호를 받고자 했습니다. 사직단(社稷壇)은 사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단이 있던 곳입니다. 그곳은 1922년 일제에 의해 사직공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신성한 지역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한 것입니다. 사직단은 현재 그 공원 안에 있습니다.


사실 사직은 동서양 어디를 보더라도 신화와 종교가 있는 나라엔 등장하고 있습니다. 신화의 원조격인 그리스 신화에도 제우스가 등장하기 전부터 대지의 신인 가이아와 농경의 신인 크로노스가 존재했으니까요. 기독교에선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이 관장했습니다. 유일신이니 맡길 신이 주변에 없어서도 전지전능하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 상고사의 군주인 요순 임금은 농경에서 가장 중요한 치수에 능한 자들이었습니다. 역시 일본의 고대 천황은 농경의 신을 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해 첫 곡물을 수확하면 감사의 표시로 그것을 관장한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곤 했습니다. 우리의 전래 명절인 추석이나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처럼 말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농경이나 목축이 생활의 전반이었던 과거엔 그것의 기반인 땅과 그것의 결과물인 곡물이나 목축물을 관장하는 신들을 숭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조선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할 정도로 농업을 중시한 농본주의의 국가였으니까요.


조선 시대 토지와 곡물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사직단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하지만 종묘의 경우는 사직과는 다릅니다. 일단 이런 장소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곳에 일전에 쓴 <영화 '노량'의 시마즈와 사쓰마(가고시마)>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한 지역에서 천년 위세를 떨친 가문은 전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절반으로 줄여 5백 년 가문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 오랜 기간을 한 혈족으로만 승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한, 당, 송, 명, 청 중에서 300년을 넘긴 왕조는 송나라가 유일했습니다. 그나마 갓 넘긴 320년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왕조가 살아있는 영국의 윈저 왕가는 1917년에 시작되었으니 이제 겨우 백 년을 넘겼을 뿐입니다. 기원전 660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천황 가문이 그 이상이라고는 하지만 지배력을 상실한 기간이 많고 신화 속에 존재한 기간도 많아 정확성을 가늠하기 힘이 듭니다. 그리고 중간에 거소도 몇 번 옮겼습니다. 그 기간 중엔 위의 영국처럼 후사로 남자가 없을 경우 여자 천황이 다스리기도 했습니다. 8명이나 있었으니까요.


조선은 확실하게 전주 이씨 한 혈족으로만 이어진 가문의 왕조였습니다. 태정태세문단세부터 정순헌철고순까지 518년 동안 오롯이 한 피(blood)로 오늘날 서울에서 집권하였습니다. 물론 여왕은 없고 남자만이 왕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조선 이전의 왕조들도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고구려 왕조는 705년(BC37~AD668, 28대), 백제 왕조는 678년(BC18~AD660, 31대), 그리고 고려 왕조는 474년(918~1392, 34대)이나 이어졌으니까요. 3개 성씨의 왕들이 다스리고 여왕도 있었던 신라 왕조의 경우는 무려 992년(BC57~AD935, 56대) 동안이나 이어졌습니다. 과연 은근과 끈기의 민족 맞습니다.


이렇듯 단일 가문의 500년 조선 왕조도 놀랍지만 그 왕조의 모든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셔놓은 종묘가 있고, 오늘날까지도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묘제례를 행하고 있는 것 또한 매우 놀라운 사실입니다. 위에서 세계유일이라 칭한 것은 바로 이 사실입니다. 종묘는 언뜻 보면 일본의 신궁과 비슷해 보이지만 신사를 겸한 신궁은 종묘와는 전혀 다릅니다. 일본 신사의 총본산인 이세 신궁은 일본 신화 속 태양신이며 천황가의 시조인 아마테라스를 참배하는 곳이고, 도쿄의 메이지 신궁처럼 신궁은 특정 천황을 기리는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일반 신사는 일본의 수많은 토속 신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또한 서구 유럽의 오래된 성당 바닥이나 벽면에 모셔져 있는 과거 왕들의 묘는 말 그대로 그들의 무덤입니다. 튀르키예의 유명한 관광지인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의 연합 무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여있지만 그곳은 육체(body)가 있는 무덤이지 혼백(soul)이 분리되어 있는 사당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 궁궐과는 달리 화려함이 배제된 종묘 건축물의 단청


그래서 종묘가 특이한 곳입니다. 그곳은 역대 왕들의 혼백만을 모아놓고 기리는 곳이니까요. 종묘에선 지금도 매년 조선시대 왕들이 그러했듯이 종묘제례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후손은 더 이상 이 나라의 왕은 아니지만 조선 왕가였던 전주 이씨 문중의 사람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엔 1년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연말 납일 등 총 5회를 지냈지만 지금은 매년 5월 첫 번째 일요일에 1회 지냅니다. 그날은 제사일이지만 이씨 왕조의 후손을 포함하여 그것을 참관하러 온 많은 내외국인들로 붐비는 날이 되었습니다. 신전과도 같이 거룩하고 신성한 종묘가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종묘제례악이라 칭하는 화려한 음악과 춤까지 동원되니 마치 과거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와도 같은 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종묘제례일은 몰락한 왕조인 한 가문의 제사를 겸한 국가적인 문화행사일로 바뀌었습니다. 그곳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도 TV의 뉴스를 통해서 그 행사를 보곤 합니다. 종묘와 종묘제례는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종묘제례악은 국가무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 다음 주말엔 종묘의 메인 건물인 정전과 서브 건물인 영녕전, 그리고 그곳에 신주가 모셔진 왕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https://youtu.be/lYApvdP8SVQ?si=bi4r9JjRySKvMe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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