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아니, 여름은 아직도 위대하고 있습니다. 계절을 기온이 아닌 시간, 특히 초분시일주월년 중 월령으로 계산해온 우리에게 9월은 예전부터 가을이 분명하지만, 9월 하고도 11일이 지났음에도 오늘 서울의 한낮 기온은 무려 섭씨 35도에 육박하니까요. 이 정도면 한여름, 성하의 날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니 9월이 되었음에도 아직 가을은 오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생애 이렇게 높고도 긴 여름이 있었던가요? 삼라만상을 주관하는 종교 속 조물주가 정신줄을 놓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신화 속 태양의 신 헬리오스가 하늘길을 착각해 아직도 계속 그의 불수레를 여름 궤도로 운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정도면 그 시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상했던 희랍인 이카루스도 그의 비행 일정을 연기했을 것입니다. 또한 위와 같이 주를 찬미한 시인 릴케도 그가 써놓은 시의 발표일을 뒤로 미루었을지 모릅니다.
그동안 "이젠 가을이다"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했습니까? 특히 펜을 쓰는 사람들의 거짓말은 더했습니다. 그들은 여름이 아무리 뜨거워도 세월엔 장사가 없기에 그렇게 시간과 자연의 법칙을 믿었을 것입니다. 지난 8월 초순 말복이 왔을 때, 중순 입추가 되었을 때, 그리고 하순 처서가 되었을 때, 그렇게 절기가 바뀔 때마다 거짓말의 강도는 점점 세어졌습니다. 마치 주식 시장에서 잃은 돈을 만회하기 위해 물타기로 돈을 더 넣듯이 그들의 가을 목소리는 더 커진 것입니다. 여기엔 펜맨뿐만이 아니라 전문가들도 가세했습니다. 매일 밤 TV에 나와서 날씨를 예보하는 아름다운 기상캐스터들도 지속적으로 전 국민을 상대로 "가을이 왔다"라고 거짓말을 해댔습니다. 마치 동화 속 어떤 소년이 마을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늑대가 왔다"라고 외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9월이 왔습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진작에 왔어야 될 가을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고 뜸만 들이고 있습니다. 아니 뜸까지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같은 섭씨 35도가 보통 온도는 아니니까요. 그래서인지 9월이 되면서 주변에서 가을에 대한 언급은 줄어들었습니다. 또 틀릴까 봐 자신감이 줄어든 것입니다. 게다가 지난 주말인 7일은 백로였습니다. 이슬이 하얗게 내려앉는다는 절기임에도 가을이 왔다고 하는 펜맨이나 캐스터가 줄어든 것입니다. 이젠 믿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도 그럴 것입니다. 그간 글로, 말로 하도 속아서 더 이상 약발이 안 먹히는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한낮의 불볕더위와 한밤의 열대야는 여름 뺨 때릴 정도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백로 시작 6일차부터는 제비가 우리나라를 떠나서 강남으로 간다는데 지금 날씨는 서늘해지기는커녕 워낙 더워서 날아다니는 제비를 구경조차 하기 힘이 듭니다. 과거 우리 조상님들의 누적된 지혜도 이번 여름 더위 앞에선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추석 D-6, 아직도 가을은 요원해 보입니다. 고백하자면 사실 저도 지난주 그 가을 늑대소년의 행렬에 합류했었습니다.<추석 D-15 양재천의 벼>란 글을 통해 가을을 예언한 것입니다. "지난여름이 아무리 위대했다지만 이젠 가을가을 합니다."라고 가을을 노래했습니다. 물증으로 양재천의 논에서 자라는 색은 노래지고, 고개를 숙이는 벼의 모습까지 사진으로 제시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저의 예언도 거짓말로 판명이 났습니다. 저의 경솔함을 반성하며 9일 전 제가 한 가을 예언을 취소합니다. 그리고 사과드립니다.
추석 D-6 , 9월 11일 양재천의 벼. 아래 사진은 반대편의 모습. 사진 속은 가을
추석 D-15, 9월 2일 양재천의 벼
오늘도 저는 양재천에 가서 벼를 보고 왔습니다. 9일 후입니다. 정오경 갔는데 너무 더웠습니다. 오늘은 정말 7말8초 이상 가는 올해 최고 더위인 듯합니다. 9월이라 체감온도가 더 체증되게 느껴져서 그런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관찰하면서 사진을 찍는 잠깐의 시간이었음에도 상의는 개숫물의 행주처럼 완전히 물에 젖었고 그 사진 한 방 찍는 짧은 시간이 무척이나 괴로웠습니다. 벼는 더 익어서 더 노래지고 더 고개를 숙였음에도 말입니다. 그러함에도, 추석이 불과 엿새 남았지만 아직도 가을이라 말하기에는 힘이 듭니다. 지금까지 가을을 말했던 사람들은 더 이상 가을을 얘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라면 진짜 가을이 오기는 할까요? 설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올가을의 정체가 고도는 아닌지요? 당장은 자신이 없으니 추석을 건너뛰어 단풍과 낙엽이 있는 먼 가을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