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의 값

by 육동녕


IMF의 아우성과 비명이 거리에 가득하고 나라는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1997년 겨울, 형님의 전화에 학원골목 안에 있는 돼지갈빗집으로 향했다. 모두가 안간힘을 쓴 보람도 없이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은 영업정지에 이어 파산되었고 갈데없이 실업자가 된 나는 앞으로의 생계대책이 막막한 가운데 동네 도서관에 앉아있는 날이 많았는데 계획이란 게, 팔자에 없는 공인중개사나 요리사 시험 준비나 해 볼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온갖 잡념에 집중이 될 리 없고 잡지나 소설을 뒤적이는 게 일과였다. 막상 직장의 옷을 벗고 나니 가깝던 친구들도 만나기가 꺼려지고 갈 곳도 마땅치 않으니 그나마 돈 안 들고 시간 보내기는 동네 도서관만 한 곳이 없었다. 말없이 술잔만 비우던 형님은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아이 엄마하고 어디 여행이나 한번 다녀와"


형님은 회사 예금거래 고객으로, 별다른 연고도 없이 가깝게 지내게 된 사이다. 계기가 있다면, 수신담당부서를 맡고 있을 때 기업을 운영하는 형님과 어쩌다 운동을 같이 나가거나 고객관리 차원에서 가끔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고 마침 사는 동네가 가까워 집 근처 둑길에서 두 가족이 함께 저녁 산책을 같이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나이도 열 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코드가 맞아서 그랬는지 만나면 재미있고 편안해서 나중에는 별 격식 차리지도 않고 서로 전화해 동네 골목에서 소주 한잔에 즐겁곤 했는데 어느 날,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형제'로 살자고 했다. 그때만 해도 이북에서 내려와 다른 일가친척이라고는 없는 형님이 좀 외로우신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고 어색한 대로 형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소주잔을 내려놓고 봉투를 열어보니 천만 원 수표가 한 장 들어있다. 특별한 관계도 아닌 사이에 천만 원은 말도 안 되는 큰 액수이다. 백만 원을 내가 잘못 봤나? 아니면 실수로 잘 못 넣으셨나. 고개를 들어보니 형님 눈 가가 벌겋게 젖어있었다. 한 때 그렇게 밝고 항상 쾌활하던 놈이 실직한 데다 생계까지 막연하여 어깨가 축 늘어져 있으니 측은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형님은 내가 실직한 건 물론, 검찰에도 불려 다니고 요즘 하루 보내기도 힘들어한다는 것 까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나는 봉투를 연탄난로 반대편으로 밀며 말했다. "제가 꼭 필요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받을 이유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그 뒤에도 가끔 만나 소주는 나누었지만 봉투 얘기는 더 이상 없었고 나도 애써 밝은 기색으로 시국이나 주변 이야기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이민을 가기로 했다는 걸 말씀드린 날은 별 말도 없이 둘 다 술을 많이도 마셨다. 다니던 직장의 예금고객과 수신 직원 사이였던 우리는 이상하게도 회사가 없어진 이후에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캐나다로 떠나기 전날 밤, 우리 부부는 아껴두었던 양주 한 병을 들고 형님을 찾았고 몇 잔 나누어 마신 형님과 나는 아내가 형수님과 얘기하는 동안 밖으로 나와 캄캄한 화단 턱에 걸터앉았는데 그때 아파트 모서리의 가로등 빛에 우는 형님을 보았다. 몇 년 후면 돌아올 거라 오히려 형님을 위로하며 안았는데 그때도 형님은 별 말이 없었다.


형님이 먼 길을 오셨다. 그것도 지금 막 결혼식을 끝낸 아들 내외와 함께. 우리는 밴쿠버에 도착한 지 2년 만에 밴쿠버 외곽에 작은 집을 사서 이사를 했고 한국에 갈 때 뵌 형님께 언제 한번 다녀가시란 인사를 드렸는데 진짜로 오신 것이다. 반갑고 귀한 손님을 맞아 우리는 몇 군데 구경도 모시고 다니고 저녁때면 바비큐에 소주도 나누면서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 생각엔 아들의 신혼여행을 겸해 오신 걸로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아들 내외는 이틀 후 다른 곳으로 떠났고 형님 내외분은 몇 주를 더 머무르며 우리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앞으로는 무슨 계획이 있는지 등의 얘기를 나눈 다음 입주선물이라며 살림살이도 몇 개 넣어주신 후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부모님 일로 1년에 한두 번은 한국에 가게 되고 갈 때마다 형님을 만나 뵙는 게 절차가 되어버렸다. 3년째 되던 해 한국에서 돌아오기 며칠 전, 형님으로부터 공항 가는 길에 점심이나 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밴쿠버행 비행기는 오후 6시 출발이다. 형님은 지난번 만나 뵀으니 아마도 '형수님이 밴쿠버 아내에게 챙겨 보낼 게 있나 보다' 생각하며 나갔더니 은행 직원과의 합석 자리였고 혹시 당신이 밴쿠버에 필요한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나의 벤쿠버 거래은행 계좌번호를 남겨두고 가라고 하셨다. 돌아와 며칠 후 계좌를 열어보니 큰 액수의 미국 돈이 들어와 있었다. 놀라 전화를 드린 나에게 형님은, ‘그게 지금 가진 전부인데 사업하는데 보태도록 하고 잘 되면 언제든 제 자리에 갖다 놓으면 된다’는 말씀이었다.


아아, 형님은 이걸 위해 지난번 일부러 다녀가셨고 담보는 물론, 차용증서 하나 없이 이런 큰돈을 나를 믿고 맡기셨다. 만일 갚지 못하는 경우라도 생긴다면? 그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아무리 믿고 좋아하는 아우라도 낯선 땅에서 경험도 없는 사업에 실패할 수 있으니 이 적지 않은 돈의 대여는 손실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 때문인가. 형님이 나를 위해 스스로 이렇게 큰 위험부담을 안는 까닭은?

아마도 그것은 형님이 언젠가 나에게 '형제로 살자'라고 했던 말 '한마디의 값' 때문 일 것이다.

내가 형님을 옛 거래고객으로 생각하는 동안 형님은 나를 돌봐야 할 아우로 생각했던 것이다.


카나다 이민도착 후, 적은 돈으로 시작할 수 있는 빨래방이나 달러 샵을 주로 알아보고 다니던 나는, 형님의 돈에 집 담보 은행융자를 더해 그동안 눈여겨봐 두었던 앨버타 오일 타운의 모텔을 인수하고 운영을 시작했는데 그때 내가 몰랐던 것은, 캐나다 원유의 생산지인 앨버타의 경기와 사업의 성패는 본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원유의 국제시세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었다. 이민후, 한국 교민들과의 교류가 적었던 나는 수많은 교민들이 앨버타에서 고생 끝에 사업에 실패하고 돌아온 사례들을 몰랐었다. 실제로 내가 인수한 모텔이 크고 멀쩡한데도 값이 싸고 인수조건이 좋았던 것도 이미 몇 년 전에 부도가 나 지금은 은행이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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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을 인수하고 몇 달 동안 고객이 없는 텅 빈 방들을 보며, 만일 내가 망해서 형님 돈을 못 갚을 땐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목숨을 건다는 말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실감 있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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