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깃발

by 육동녕

만화나 영화에서 악당들을 무찌르기 위해서 반드시 정의의 사자 슈퍼맨이 나타나고 정의는 멋지게 승리하게 되어있다. 언제나 슈퍼맨은 이겨서 관객은 환호하고 악당들은 죽거나 도망치면서 끝이 난다. 대체로 악당이 왜 악당인지, 혹시 억울한 점은 없는지 밝혀주는 장면은 없다. IMF로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하고 엄청난 실업자가 쏟아지면서 온 나라에 불어닥친 혼란의 소용돌이는 금융 쪽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20년을 넘게 몸담았던 종합금융사도 구조조정의 거센 바람앞에 끝내는 간판을 내 렸고 모든 임 직원들은 실업자가 된 것도 모자라 졸지에 나라를 망친 악당이 되었다.

예금지급능력이 없어진 부실 금융기관들에게는, 예금자를 위한 공적자금이 투입된다. 국민의 세금인 공적자금은, 정부를 대신해 예금보험공사에서 관리하는데 예금을 대신 지급함으로써 채권자가 된 예금보험공사는 해당 금융기관으로부터 확보한 자산이나 담보를 통해, 그리고 해당 금융기관의 책임 있는 임직원에 대한 재산 추적과 처벌을 통해 투입된 공적자금 회수에 나선다.


금융기관으로서 예금자들의 소중한 예금을 지급불능에 이르게 하고 공적자금을 투입하게 했으니 부실 금융기관 임직원 모두는 시대의 악당이고 이 악당들을 처단하기 위해 정의의 사도가 등장한다. 금융감독원등 감독관청은 '징계와 형사고발'로, 예금보험공사는 '재산압류와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방법으로 이 악당들의 뒤를 쫓는다. 부실금융기관에는 관련 법에 의해 '경영관리 위원회'가 구성되어 파산절차를 진행하고 감독관청의 직원이 '지배인'이란 명목으로 회사를 점령하여 집행자가 되는데 이들, 경영관리위원들과 지배인이 곧 완장을 찬 '정의의 사도'이다.


부실금융기관에 설치되는 '경영관리위원회'는 지배인을 뒷받침하는 심의 의결기구로, 정부부처와 감독기관의 고위직들과 변호사, 회계사등 7-8인으로 구성되고 이제는 주인이 없어져 버린 금융기관의 파산절차 진행을 위해 지배인이 제출한 안건을 심의하고 승인한다. 회계사는 해당 부실법인의 파산절차를 위한 실사작업을 하게 되고 변호사는 파산에 책임 있는 채무자나 주주, 임직원에 대한 수십 건의 소송에 착수한다. '경영관리위원'들이 수임하고 진행하는 실사와 소송비용은 위원회의 간단한 결의로 모두 파산금융기관으로부터 지출되며 이 역시 결국은 국민의 세금이다.


내가 있던 회사의 경우, 변호사 경영위원은 전 임원과 주주에 대해 손해배상청구 소송비용으로 7억 2천만 원, 회계사 경영위원은 자산실사비용으로 1억 원을 비용으로 인출했는데 이 모든 지출은 경영위원회의 결의에 의해서였다. 법적인 기구의 합법적인 절차에 의한 지출이니 추후 문제가 될 수도 없고 문제가 된들 책임소재를 가릴 수 없다. 소송비용이든 실사비용이든 지배인은 물론, 다른 경영위원들이 아무런 대가없이 그냥 합의해주었을 리는 없다.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모든 지출비용은 사전합의로 각자의 몫이 배분되었을 테니 같은 배를 탄 이들의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하다.


IMF 당시, 부실 금융기관이 600여 개 법인이었고 부실금융기관 주주, 임직원의 수가 6,000명을 넘었으니 실사와 소송을 진행하는 회계법인과 법무법인으로 흘러들어 간 돈은 얼마였을까. 전국의 회계사와 변호사가 부족할 지경이었고 그들에게는 단군이래 이런 호경기가 없었다. 유관 정부부처 공무원이나 감독기관의 고위직, 회계사와 변호사들은 모든 연줄을 동원해 이제는 주주도, 책임 있는 경영자도 없는 파산기관이란 고깃덩이에 모두가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법'이란 두건을 쓰고 정의를 실행하는 깃발을 든 그들에게 무엇이 진실인지는 '관심 밖'이었고 부실기업이나 금융기관 임직원들이 안게 될 암울한 미래는 '남의 일'이었다.


부실로 기업이나 금융기관이 파산을 맞게 되면 대주주나 경영진은 모든 것을 잃게 되고 거기다 형사책임까지 떠안게 된다. 대주주의 지분에 따라 금융기관의 자산가치는 몇백, 몇천억이 될 수도 있으니 살릴 수만 있다면 로비자금 몇십억은 문제도 아니다. 파산위기에 처한 금융기관을 살리기 위해 대주주나 경영진이 현금보따리를 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청와대나, 국회의원, 정부, 감독관청의 고위직들을 찾아 밤에 이루어지는 필사적인 로비의 규모는 또한 얼마였을까. 우리의 불행했던 IMF는 분명히 6.25 이후 최대의 국가적 비극이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나는 축제의 파티장이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주저앉고만 싶던 어느 날, 나는 소명 자료들을 챙겨 나에게 602억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예금보험공사를 찾았다. 한참을 기다려 만난 '완장 찬 슈퍼맨'은 나의 항변 자료를 보지도 않은 채, "억울하면 소송에 참가해서 승소하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금세 자리를 떴다. 나라의 잘못으로 닥친 IMF에, 졸지에 악당이 되어 국가기관과 싸워야 하는 소송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다. 이제 온갖 손가락질속에 평생을 전과자나 채무자로 살아야 하며 아파트 경비원조차도 할 수 없게 된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돌아 나오는 복도 한편에 나와 비슷한 몰골의 몇몇 사람들이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정의의 깃발이 펄럭이는 공사 건물 아래로 저녁 햇살에 길게 드리워진 건물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자에서는, 정의의 슈퍼맨들의 신나는 합창소리와 함께 악당들의 비명과 신음소리도 들려왔다.

처음으로,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이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년이 지나도 아무런 미래가 없을 여기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으니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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