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겨울, 중국 특수로 석유값이 배럴당 100불이 넘으면서 캐나다 앨버타주 전체는 활기가 넘쳐났지만 어디나 일 할 사람이 부족해 아우성이었다.
우리도 청소원이 반으로 줄어든 심각한 상태여서 지역신문은 물론, 밴쿠버의 여러 한국 신문에까지 '사람 구함'의 광고를 냈지만 이 춥고 먼 곳까지 와서 일 할 사람은 없었다. 하루하루가 위태롭게 넘어가는 상황이었고 모텔을 비울 수도 없는 상황이라, 아이를 태우고 3,500Km 떨어진 동부지역 키치너에 있는 대학의 입학식에 가기로 했던 사치스러운 계획은 취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늦은 밤,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는 토론토 외곽의 모텔에서 청소 일하는 부부로, 광고 보고 전화드렸고 받아주시면 그쪽으로 옮기고 싶은데 짐도 좀 있는 데다 차가 없어 갈 방법이 없다”는 거다. 찾아보니 키치너는 토론토에서 120km. 거리, -생각하고 말고 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계획을 바꿔, 아이를 키치너에 내려준 다음 오는 길에 그 한국인 부부를 태워 오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말이 3,500km이지, 안 자고 교대로 밤낮 3일은 운전해야 하고 왕복 7,000km라면 기름을 15번 이상은 넣어야 하는 장거리다. 아이를 기숙사에 내려준 뒤 오는 길에, 약속했던 한국인 부부를 만났는데 남자는 대머리에 50은 훨씬 넘어 보이는 작은 체구였고 부인은 일은 해 본 것 같지도 않은 다소 뚱뚱한 귀부인 타입이라 속으로 좀 실망스러웠다. 이 먼 곳까지 헛고생한 건 아닌가.
슈페리어호와 휴런 호등 말로만 듣던 오대호를 가로질러 돌아 평원을 달리는 길은 기막히게 아름다웠지만 이미 며칠 동안의 장거리 교대운전으로 피로와 불면에 지친 우리 부부는 기진맥진해 경치 구경이고 뭐고가 없었다. 소형 트럭에 이삿짐 보따리까지 빼꼭히 쌓아 채워 넣고 네 사람이 앉다 보니 차 안은 몸을 돌릴 수조차 없게 비좁아 같이 오는 길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모텔 상황을 생각하면 한 시라도 빨리 가야 하겠기에 쉬지도 못하고 밤샘 운전하다가 어느 휴게소에서 간식으로 빵을 나눠먹으며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 이름은 어떻게 되나요?' '........' "?" 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물어도 끝내 대답이 없었다.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은가.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그날을 지난 뒤 다음날 Sub way로 저녁 식사하는 앉은자리에서, '그래도 부를 이름은 있어야지요. 괜찮으면 내가 지어도 될까요?" - 그래서 부부는 Paul과 Jenny가 됐다.
돌아와 보니 모텔은 여전히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네 명의 청소원이 종일 매달려도 방은 청소가 덜 돼 예약 손님은 우왕좌왕이고 설상가상으로 온수탱크까지 고장이 나 영하의 추위에 손님들의 항의가 빗발이었다. 도착하자마자 Paul과 Jenny에게는 우선 우리가 사는 집의 지하층으로 거처를 마련해 주고 쉴 틈도 없이 모텔에 속한 건물 세 곳 중 본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아파트 한 동의 청소를 맡겼다.
Paul부부는, 일손부족으로 숨넘어갈 만큼 급박한 모텔 사정을 금세 이해했고 일의 분량이 무리하다 싶었는데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왔던 것처럼 잘 소화해 주었으며 시간이 지나며 청소뿐만 아니라 나중엔 내가 미처 생각 못했던 작업의 개선과 관리 문제 등도 서로 의논하게까지 되었다. 맡은 일을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내는 그들을 보며 한시름 놓게 되었고 그들을 얻은 행운에 감사했고 자주 자리를 같이 하며 많은 대화를 했지만 부부는 신상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는 법이 없었고 우리도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애당초 전화통화에서 근무의 조건으로 현금지급을 원해왔을 때, 떠도는 불법체류자인 것은 짐작했지만 도착 뒤에도 신상은 물론, 이름조차도 밝히지 않다 보니 Paul부부의 행적이나 신분이 의심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회사 경영 중 사업부도 등 돌아갈 수 없는 사정으로 도피 중이 이라면 그나마 괜찮다 해도 혹시 수배 중인 형사범이라면?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아무런 내색 않고 지내는 동안 점차 서로 농담을 나눌 정도로 가까워졌고 한 두 달 지나면서 Paul부부의 다른 모습에 속으로 감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일을 마치고 호숫가 산책을 하거나 저녁 무렵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 Paul의 해박한 지식, 예를 들어 영화나 음악, 또는 소설 등에 관한 주관, 나와 의견이 다를 때 펼치는 논리, 유머와 분위기를 끄는 힘은 비록 최대한 절제된 말과 행동인 가운데서도 빛이 났고 대화는 늘 즐거웠으며 종일 청소일로 지쳤을 Jenny도 가끔 직접 만든 음식으로 우리를 놀라게 해 부부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고 어느덧 더 이상 종업원이 아닌 서로 아끼는 친구 가족 사이가 되어갔다.
모텔에 필요한 침구나 부속, 또는 한국식품점 쇼핑 때문에 가끔은 주도인 에드먼턴에 나갈 일이 생긴다. 겨울 해는 짧으므로 자동차로 3시간 걸리는 에드먼턴에 가면 일을 최대한 신속히 마치자마자 길이 빙판이 되기 전에 돌아와야 하고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야간 운전하기는 더 힘들기 때문에 마음이 바쁘다. 그날도 Paul과 에드먼턴에 가서 서둘러 일을 마치고 Paul에게 구입한 물품을 맡긴 다음, 나는 차에 주유를 하고 커피와 빵 등, 돌아가는 길에 먹을 간식을 사 돌아오니 물품만 제 자리에 있고 Paul은 간 곳이 없다.
먼 길을 갈 걱정에 부아가 나기 시작할 때쯤 Paul이 나타났다. 사과나 변명도 없이 나를 외면하며 주섬주섬 짐을 싣고는 말없이 차에 올라 앞에만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 나는 더 화가 나서 말이 없는 채 운전하며 내일 일의 걱정에 빠져있는데 한 시간쯤 왔을까, 차의 소음과 라디오 음악소리에 섞인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군요. 조금 울고 조금 기도하다 보니 출발이 늦어져 죄송하네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앨버타의 울어대는 눈 폭풍 속에 나는 몰던 차를 길가에 세웠다.
그 해, 그렇게 바쁘고 추웠던 겨울을 Paul부부 덕분에 넘길 수 있었다. 일이 힘들 텐데도 전화만 하면, "네, Paul입니다. 사장님!" 하는 씩씩하고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이든 지시를 하면 다음 대답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예 그거 문제안 됩니다. 사장님!" 낯선 곳에서의 힘든 일이었지만 나는 손 아래인 그가 오히려 든든한 의지가 되어갔다.
그러는 동안 주 노동청에 신청해 놓았던 필리핀 청소원 2명이 도착했고 봄이 되고 땅이 녹으면서 석유 채굴이 끝난 오일회사들의 휴업으로 나갔던 직원들이 복귀하는 바람에 청소직원이 남아돌게 되었다. 이제는 Paul 네 부부도 일에 한결 여유가 생겨 우리와 함께 자주 나가 산책도 하고 가끔은 멀리 호숫가를 찾아 소주와 함께 고기를 구워 먹기도 하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사장님, 모텔도 이제 괜찮아졌고 저희는 이제 곧 떠날 생각입니다.'
부부는 No!라는 내 대답에는 아랑곳없이 이삿짐을 싸고 떠날 준비를 했다. 꼭 일 년 2개월 만이었다. 모텔이 특히 전쟁 같았던 두 번의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건 온전히 Paul부부의 덕분이었다. Jenny라도 설득해 볼까 해서 찾은 Paul의 방 한 구석에 일 년 전, 올 때 그대로인 때 묻은 이삿짐 보따리들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Paul은 모텔의 일이 줄면서 시간제로 일당을 받는 다른 청소원들과 달리 정액급으로, 그것도 현금으로 급여를 받는 것을 미안해했다.
나는 행선지조차 밝히지 않는, 모든 것이 제 맘대로 인 고집불통 paul에게 화가 잔뜩 나 인사차 방으로 찾아온 부부를 못 본 체 딴전만 피웠다. 다음날 아침, 작은 U-Haul이삿짐차가 왔고 작별인사를 길게 나눌 틈도 없이 그들은 떠났고 그걸로 끝이었다.
지금도 들리는듯하다. 내가 Paul을 찾을 때마다 전화에서 들려오던 활기 찬 목소리,
'네 Paul입니다. 사장님!'
그들 부부는 어떻게 우리에게 왔을까. 그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