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망향 노래

by 육동녕

한국이 2000년을 전후해 IMF의 후유증으로 사회가 혼란하고 앞이 보이지 않았을 때, 무지개처럼 다가온 이민의 환상은 누구에게나 커다란 유혹이었고 대부분은 엄두가 나지 않아 생각만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용기 있게 떨치고 일어나 이민열차를 올라탔지요.


새 인생을 시작할 새 나라를 향해! 막상 떠난다 생각하니 어디 걸리는 게 한두가지였겠습니까. 백번을 생각해도 흔들리는 마음에 갈피를 잡기 어려웠고 그러나 어디에도 정답은 없었으니 이민 전야에 마지막 술잔을 엎으며 이렇게 말했었지요.

“까짓 거, 죽기밖에 더할까”


‘모든 것은 가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살아온 천하태평 마누라, 한창 정신병자 수준인 사춘기 아이들과 시작한 이민생활. 웅장한 대자연, 깨끗하고 질서 있는 도시, 친절한 사람들, 무엇보다 ‘부킹’도 필요 없는 값싸고 아름다운 골프장,


당시 악다구니 속의 한국을 떠 올릴 때면, ‘이런 세상도 다 있었네’하는 수없는 감동으로 선택을 애써 자찬하곤 했지만 한 두해 통장잔고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걸 느끼면서 앞으로 긴 세월 살아갈 일이 온갖 두려움으로 다가와 떠날 때의 각오는 걱정으로 바뀌어갔지요.


그 후로 꼭 20년이 지났는데 그 긴 시간이 어쩌면 눈 깜짝 한 순간 같기도 합니다. 사업과 건강과 부부와 아이들의 일들. 그동안의 불운과 행운, 갈등과 고민, 여러 우여곡절, 모든 만남과 마침내 다가온 세월. 롤러 코스타 같은 제가 겪은 이 각본 없는 기막힌 드라마를 언젠가 누구에겐가 밤을 새우며 얘기할 일이 있을지요.


하긴 이민자 백 명이면 백개의 드라마가 있을 테니 제 얘기래 봐야 수없는 그저 그런 얘기 중의 하나이겠지만. 이민 1세대는 상륙전의 해병대로 비유됩니다. 그 모든 행진에서 같이 전진하던 이웃이 넘어지거나 다치는 모습도 보아 오면서 지금 살아남아 있는 것만도 그게 어디인가요.


단순히 살아남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IMF 때 실직했거나 사업이 잘못된 친구들은 물론, 운이 좋아 몇 해 더 직장에 남아있던 보통의 친구들 모두 낯선 타국에서 내가 일했던 그 오랜 나날동안 이제는 모든 일이 끝나고 산에 다니거나 병원 다니거나 가끔은 세상을 하직했거나이고 만나면 온통 노후생계와 건강과 아이들 결혼 걱정들이 관심사입니다.


이민 생활이라는 게, 고국에서보다 더한 노력과 마음 졸임에도 늘 불안하고 서럽기까지 해서 어쩌면 고국에서 사는 것보다 호강은커녕, 하루하루 온통 살얼음판 위의 조심걸음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큰 세상을 만나보았고 한 인생을 더 살았으며 몇 개 인생 스토리를 더 건진 것만으로 꽤 남는 장사를 한 것으로 자부하곤 합니다.


낯선 땅에서 살기 위해 힘들 때마다, 서러울 때마다, 고향산천 그리울 때마다, ‘만일 안 왔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해 보지요. 아마도 내 나라니 눈치 안 보고 조금은 더 당당하게 살았겠고 지금은 안 계신 부모님 곁에 조금은 더 있어드렸겠고 조금은 더 친구들이나 이웃의 체온을 느끼면서 살았겠지요.


내가 록키의 웅대한 대 자연에 감탄하고 있을 때, 90살 어머니는 천리 밖의 아들을 그리며 긴 시간 버스를 갈아타고 인천공항을 찾아,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보시며 종일을 앉아계시기도 했다는군요. 죄송한 마음에, 세상일 한참이 지나도 뭐가 최선이었는지 돌아보면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이민의 성공은 무엇인가요. 만일, 돈이라면 크게 구차하지 않으니 성공이고, 아이들이라면 결혼과 직장과 손주까지 있으니 성공이고, 가정과 건강이라면 아직 부부가 손잡고 걸을만하니 성공이긴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나고 자란 곳에 대한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과 그리움은 무엇으로도 덮을 수가 없습니다.


기억 속에서 포근함으로 남아있는 고향으로 가는 것과, 가족이 있는 이곳에 남는 길중, 늘 선택을 생각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올 때처럼 쉽지 않습니다. 고향의 산천과 마을은 그대로일까요? 돌아가면 모두 뛰어나와 반겨 맞아줄까요? 그동안 놓친 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미안함과 후회는 주워 담을 수 있을까요?


물론 한국도 옛날 같지는 않습니다. IMF로 절망적이었던 나라가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우뚝 선 오늘, 크게 달라진 경제환경 속에 모든 게 풍요롭고 생활은 윤택해졌으며 사람들의 사고조차 더 이상 내가 떠나올 때의 그 나라가 아니니 돌아가도 있을 곳이 낯설기만 하겠고 쉽게 적응도 어렵겠지요.


그래도 할 수만 있다면, 동네 결혼식장이나 친구 상갓집을 찾아 낯익은 얼굴들 사이에 끼어 앉아 시끄럽게 떠들기도 하고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불쑥 부모님 묘소에 올라 술 한잔 부어놓고 울기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모두 늙어버린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이 아무 때나 하는 것처럼요.




.. 그렇지만 세상사 모든 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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