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에 내가 운영하던 모텔로 집사람과 아이들을 오게 한 기억이 있다. 12월이 되면 이미 초순부터 캐나다 앨버타주 북쪽의 이 작은 오일 타운은 손님들은 물론, 직원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 도시는 인적이 끊기고 적막강산이 되어버린다.
내 딴에는 오랜만에 가족들만의 시간을 가지며 도시나 모텔 구경도 시켜주고 같이 음식도 해 먹으며 새 해를 맞자는 좋은 취지였으나 아니나 다를까, 에드먼턴 공항에 내린 아이들은 이미 얼굴이 부어 있었고 모텔로 운전해 오는 세 시간 동안 내내 별 대화랄게 없었다. 그렇지, 연말에 친구들과 파티다 뭐다 계획도 있었을 테고 아니면 방학인데 집에서 컴퓨터 오락이나 하면 좋을 시간에.
사실, 아이들과의 사이는 별로 좋다고 할 게 없다. 이민전,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이라는 게 퇴근 후의 시간도 야근이다, 회식이다, 접대다 늦기 일쑤이고 주말조차 직원들과 또는 거래처와 어울려야 하니 아이들 생활이나 교육은 온전히 엄마 몫일 수밖에 없고 어쩌다 큰 맘먹고 고깃집에라도 데려가 분위기 잡으려면 반응이 별로여서 겉도는 대화에 그저 데면데면하다가 일방적 설교로 끝이 나고 만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부모는 아이들과 별 논의나 아무런 동의를 구한 일도 없이 느닷없이 이민가방 싸고 아이들 비행기에 태워 낯선 나라에 끌고 가 학교에 집어넣는 일이 벌어졌으니!
친구가 하나 있나. 선생이 따뜻하게 대해주길 하나. 영어가 들려야 공부도 하고 숙제도 하지. 그렇지 않아도 반항심 가득한 사춘기 중학생인데 교실에 멀뚱히 앉아, 나를 이렇게 만든 부모가 얼마나 죽이고 싶게 미웠을까.
집에 오면 내용도 모르는 교과서를 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아이들 보는게 일인데 돌겠는 건, 부모인 우리도 무엇하나 도와줄 게 없는 것이었다. 그저 세월이 약이겠거니 하며 슬금슬금 눈치나 볼 수밖에. 거기다 나는 이민 초기 골프장 순례와 생업을 찾아 헤매는 일로 집안일은 돌아볼 틈이 없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큰 사고 안 치고 그저 '밥 안 먹고 방문이나 잠그는 정도의 반항'을 하며 고비를 넘겨준 게 다행이라면 그런 다행히 없었다.
앨버타의 추위는 체감온도가 영하 20- 30도는 보통이고 눈이 쉬지 않고 올 때면 허리까지는 쌓일 때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와 있는 아이들과 어디 나들이 가는 건 엄두도 못 내고, 인근 두 시간 이내에는 아는 한국사람도 없어 마실 갈 일도 없는데다 바비큐나 파스타도 한두 번이지, 아이들은 눈 오는 밖을 보며 돌아갈 날만 꼽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직원 없는 모텔을 혼자 끌고 가느라 쉴 틈이 없었다.
모두 크리스마스 휴가를 떠나 프런트도 청소원들도 없다 보니 모텔로 오는 예약 전화받기, 아침저녁 주차장 눈 치우기, 사람 불러 고장수리, 늦은 밤 장부정리, 집에 안 간 몇몇 고객 챙기기, 어쩌다 오는 새 손님방 청소하기 등 혼자서 챙겨야 될 일들이 쌓여있어 나는 따로 아이들 돌아볼 틈이 없었고 때가 되자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밴쿠버 집으로 돌아갔다.
나름의 가족 이벤트가 생각처럼 되지 않아 실망했지만 사실은 소득도 있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아이들은 모텔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 보던 '넥타이 맨 폼나던 아빠'가 아닌, 영어도 못하는 아빠, 고객에게 굽실거리는 아빠, 아무것도 고칠 줄 모르고 허둥대는 아빠, 하루 종일 눈 치우고 허리에 파스 붙이는 아빠, 그리고 사업의 성패 걱정으로 매일 밤 소주를 먹어야 자는 아빠를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그들 눈에는 이 혹한의 북쪽 도시에서 죽으려고 작정한 불안한 아빠를 보면서 어쩌면 우리 가족이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가족이 공동운명체임을 실감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꼭 그 덕분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아이들은 남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도 해 주었으니 늦게 온 이민치고는 크게 다행인 셈이다.
내가 편한 길을 마다하고 힘든 이민의 길을 선택하고 헤쳐 나온 건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을 선물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목소리 크게 떠들곤 했지만 정말 그랬을까. 이제 중년으로 접어드는 아이들의 사는 모습을 보는 나는 가끔 속 좁은 의문도 갖는다. 아이들은 무엇인가. 늙어 봉양의 기대도 없고 죽은 뒤 제사도 못 받아먹는 이 시대에 자식을 위한 이런 목숨을 건 큰 희생과 위험부담의 대가는 무엇일까. 아이들은 이런 부모의 마음을 알까.
이태 전, 한국에 가 있는 동안 아무래도 어머니 상태가 좋지 않아 아내에게, 한번 다녀가는 게 좋겠다는 전화를 했는데 그다음 날 밤 급히 도착한 아내는 뜻밖에 시애틀의 아들아이와 함께였다. 병원에서 갑자기 상태가 나빠진 어머니를 아이에게 맡기고 내가 집으로 아버지를 모시러 간 동안 어머니는 아이 품에서 운명하셨으니 임종하는 자손은 따로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머니는 손주를 기다리셨던 것일까. 아이는 내내 조문 손님을 문 앞에서 맞았고 산에 갈 때에는 영정사진을 들었으며 삼우제까지 같이 모신 다음 돌아갔으니 내색은 안 했지만 마음으로 좋았고 그로부터 더 이상은 속 좁은 의문도 없어졌다. 서툰 색소폰 연주 때면, ‘Danny boy’ 가사 한 구절에 아이들과의 관계에 대한 대답이 있음을 본다.
You'll come and find the place where I am lying
너는 언젠가 내가 누워있는 곳으로 다가와
And kneel and say an ave there for me.
무릎을 꿇고 ‘아빠, 제가 왔어요’ 하겠지
And I shall hear, though soft you tread above me
네가 누워있는 내 위에 서 있는 소리가 들려 울 때
And all my grave will warmer, sweeter be
내 무덤은 비로소 따뜻하고 아늑해지겠고
For you will bend and tell me that you love me
네가 몸을 숙여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니
And I shall sleep in peace until you come to me.
나는 네가 다시 올 때까지 편안하게 잠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