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캐나다로의 출국을 앞두고 김포 전철역 근처에 머물 일이 생겼다.
아내가 말했다. "우리, 김 영 씨에게 한번 연락해 볼까?"
김 영 씨는 김포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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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 교외에 있는 우리 집 입구엔 오래전, 가축 키우던 사람이 기거했다는 허름한 바깥채가 하나 딸려있는데 우리가 이사 들어간 후 그냥 두기 아까워 수리해서 세를 놓기로 했다. 집이 온통 흰색으로 칠해져 있어 우리끼리는 '화이트 하우스'라고 부르는데 김 영 씨는 유학생들과 함께 이 집에서 일 년 반쯤 살다 한국으로 돌아간 유학생 엄마다. 오래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집을 몇 주 동안 수리하고 가전제품을 집어넣고 청소까지 마친 후, 이곳 한국 신문에 임대광고를 했더니 신기하게도 며칠도 안 돼 연락이 왔다. 임대계약을 위해 전화했던 젊은 여자를 만났는데 그때가 '김 영'과의 처음 만남이었다.
입주하는 날, 도와줄거나 없나 해서 가 보니 사람들이 많아 무슨 동네모임 있는 줄 알았다. 초등학생 아이들만 열한 명에, 인솔 엄마들 둘을 합해 열 세명 모두 들어와 살 작정이고 짐이 산더미였다. 기겁을 해서 왜 계약할 때 이런 사실을 말 안 했냐고 했더니, '그러면 받아주셨겠어요?'라고 미안해하는 모습이 밉지가 않았다. 어쩐지 집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이사 오겠다는 세입자가 이상하긴 했지만,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계약한 내 잘못이니 지금 와서 어쩌랴.
이사하고 며칠 지나 우리를 찾은 김 영의, '이사 오게 된 이유'를 듣게 된 아내는 분노했다. 아직 계약기간도 반년이나 남았는데 한국사람 집주인이 퇴거를 요구해 아이들과 쫓겨나다시피 나왔고 이사 나올 때, 한 달치 보증금은 물론, 미리 낸 월세의 남은 부분도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에게 떠밀려, '약한 유학생 엄마를 괴롭히는 악질 집주인'을 찾아 단단히 따질생각으로 안 입던 정장도 찾아 차려입고 김 영을 앞 장세 워 전 집주인을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예상외로 인상 좋게 생긴 여자 집주인으로부터 기막힌 얘기를 듣게 되었다.
"유학생 엄마 두 명이 데리고 들어 온 초등생 11명이 매일 뛰고 싸우고 노는 바람에 집은 어느 곳 하나 성한 곳이 없다." "독채 임대이니 세입자가 마당 관리도 해야 하는데 잡초가 무성하여 폐가처럼 되어 동네에서도 말이 많고, " "밤늦게까지 시끄러운 온갖 소음 때문에 이웃에서도 자주 항의가 있다" "고작 한 달치 월세인 보증금으로는 집 수리비에 어림도 없다." "견적 내서 손해 청구해 봤자 될 일도 아니고 어려운 사정 봐서 그냥 비워달라고 했고 앞으로 집수리할 일이 걱정이다."
이게 사실이면 곧 닥칠 우리 얘기다! 피해 당사자로서 앞장서 항의를 해야 할 김 영이 등 돌리고 먼 산보며 묵묵히 서 있는 걸 보면 하나도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사정을 모르고 남의 일에 끼어든 나는 본전은커녕, 집주인에게 오히려 사과하고 집에 돌아와 걱정이 태산이 되었다. 기껏 돈 들여 집수리해 놓았는데 첫 세입자가 13명 유학생 가족이라니. 같이 걱정하던 아내가 말했다. "어쩌겠어, 어차피 비워뒀던 집인데 없는 셈 치지 뭐" 평소 성격이 태평인 아내는 속은 어떨지 몰라도 포기가 빠른 편이다.
김포에서 초등학생들을 교습하는 과외선생이었던 김 영은, 한국의 조기유학 열풍 속에서 따로 유학 보낼 형편이 안되자, '나라고 못할게 뭐냐'는 생각으로 동네 아이들 8명을 모집해 자신의 아이들 세명 등 모두 11명을 인솔하고, 따라나선 다른 엄마 한 사람과 함께 무작정 유학길에 올랐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어도 안 되면서 이곳에 도와줄 사람도 하나 없이 대가족을 끌고 덜컥 도착해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그녀의 무모함과 용기에 감탄했고 얼마 안 가 아내는 이 용감한 한국 유학생 엄마의 열렬한 후원자이며 팬이 되었다.
아내는, 시원하고 활달한 성품의 김 영을 마치 친정동생 만난 것처럼 좋아하고 돕고 싶어 했다. 아내와 친해진 김 영은 곧 아무 때나 우리 집을 드나드는 편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어린이날이나 연말이면 아내의 부탁으로 엄청나게 먹어대는 아이들을 위해 고기 사다 바비큐 파티도 해 줘야 했고 김 영이 다른 유학생 엄마들과 나타나는 날이면, 지하실은 춤과 노래의 광란이 되고 굿판은 자정이 넘어서야 끝이 났다. 단조로운 이민생활에서 젊고 언제나 밝은 김 영은, 우리에게 웃음 발전기였고 신선한 활력소였다.
김 영은 하루도 가만있지 않고 활발하게 움직였다.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과도 폭넓게 어울리고 이곳에서 산 중고차로 아이들과 함께 가까운 곳을 찾아 수시로 여행도 하고 중고 골프채도 사서 골프까지 치러 다녔다. 밴쿠버의 여름 햇빛 아래서 김 영은, 시댁이나 남편 등, 한국의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면서 아이들 핑계로 만난 이 새로운 세상을, 있는 동안 마음껏 즐기겠다고 단단히 작정한 모습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김 영이 세 들어온 지 1년 반이 되어갈 무렵, 우리를 찾은 김 영은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집을 떠나온 지 너무 오래되어 아픈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아이들 중학교 진학 준비도 해야 한다고 했으나, 그동안 데리고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줄어든 바람에 어려워진 경제사정도 원인인 듯싶었다. 귀국 결정을 한 김 영은, 한국에 가져갈 선물 산다며 여기저기 아울렛 가게를 바쁘게 다니고 타던 차도 팔고 온갖 소란을 피우는 동안 갈 날이 다가왔다.
차도 없앴으니 어쩌려나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떠나는 뒤치다꺼리는 모두가 '당연히 내 몫'으로 알고 있었고 떠나는 날 아침, 내가 그 많은 짐을 혼자서 끌어내 트럭에 싣는 동안 김영은 아내와 긴 수다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내내 훌쩍거리던 김 영은, 공항에 도착해 차에서 짐 내리고 있는 내게 눈물범벅인 얼굴로 다가와, "아저씨, 다음 세입자는 미리 잘 알아보고 받으세요"라고 꺽꺽 작별인사를 했다. 김 영의 떠난 집을 둘러본 우리는, 그동안 온통 부서진 집을 손 볼 생각에 난감할 뿐이었다.
김 영이 떠나자 우리는 갑자기 허전해졌고 화이트하우스를 지날 때면 그 녀가 사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아내와 얘기하며 웃음 짓곤 했다. 김 영이 돌아간 뒤에도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 아내는, '김 영의 남편은 그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거동이 불편한 상태가 되었고 김 영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꾸려간다'며 우울해했다. 열렬 '노사모'를 자처했던 김 영은, 아내에게 보낸 문자에, "가장 좋아하는 두 사람 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 이제 남은 건 아저씨밖에 없으니 꼭 건강하고 오래 사셔야 한다"라고 해 나를 감격하게 했다.
밴쿠버 여름의 찬란란 햇빛과 습도 없는 바람, 아름다운 바닷가, 아이들과 함께 걱정 없던 시간들. 김 영 씨가 우리와 함께 지낸 짧은 시간과 여기서 겪은 모든 일들은 정지된 채로 그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
전화를 받는 김 영의 목소리는 반가움에, 울음소리부터 섞여 나왔다. 그 밤으로 달려오겠다는 건 겨우 말렸으나 다음날 공항으로 오겠다는 것까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의 저녁 출국시간을 알아낸 김 영은 차를 운전하여 점심시간에 맞추어 공항에 도착하였고 멋진 바닷가 드라이브 끝에 맛집을 찾아 옛 얘기를 곁들여 점심을 같이했다. 언제나 지나간 얘기들은 즐겁고 유쾌하기 마련이다.
김 영의 환한 표정과 우리를 태워준 고급차, 맛있는 점심 대접. 돌아오는 비행기에 오르며 아내에게 말했다. "모처럼 밝아진 모습을 보니 좋네. 이제 김 영 씨도 형편이 괜찮아진 모양이지?"
아내가 말했다. “오늘 타고 나온 차 공항 렌터카야. 몰랐어요?”
나는 다시 시무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