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싸다는 골프를, 한국에서는 회사 비용으로 다녔고 이민 오니 골프장이 지천이라 값싼 그린피에 돈 들일 없이 아무 때나 치니 골프복을 타고난 건 맞다. 그러나 도자기를 굽든 남도 창을 하든, 한 우물을 30년 팠으면 지금쯤 명인 소리를 듣거나 장인이 되어 있어야 할 세월인데 나에게 골프는 할수록 힘들고 어렵고 귀찮은 '물건'이다. 살면서 이런 악연도 쉽지 않다. 안 할 수도 없어 레슨도 받고 연습장도 가고 골프채도 바꾸어 보지만 동반자 따라, 골프장 따라, 날씨 따라, 그리고 그날 기분 따라 항상 뒤죽박죽이고 언제나 첫 홀에 서는 순간 머릿속은 하얘지고 그동안의 연습이나 레슨도, 새 골프채도 모두 소용없다.
멀쩡한 신체조건을 가지고도 여전히 잘 치지 못하지만, 골프가 나를 구하는 일을 몇 번 겪으면서 이 운동과의 기이한 인연에 아직도 매달려 끌려가고 있다. 골프를 하다 보면, 마치 고스톱처럼 동반자의 품성이며 세상 어떻게 살아왔는지 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오래전, 업무로 처음 알게 된 회사 거래고객 한 분과 골프 만남이 거듭되면서 서로 즐거운 사이가 되어갔고 우리 둘은 어느 날, 골프 치고 맥주 하면서 남은 세상 '형제'로 살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시작된 '형님'은 훗날, 내가 이민의 허허벌판에서 길을 잃었을 때 손을 뻗어 나를 잡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골프가 아니었으면 없었을 인연이었다.
IMF로, 다니던 직장이 파산하고 졸지에 부실금융기관직원이 되면서 온갖 수난 속에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불면과 불안으로 정신이 극도로 지쳐가고 있을 때, 매주 억지로라도 골프에 따라나서지 않았다면 이미 시작된 우울증으로 주저앉고 말았을 것이다. 골프는, 나가기 전에 며칠 연습장도 가야 하고 운동 중에는 극도의 집중을 해야 하며 끝난 다음에는 반드시 소주를 곁들인 식사나 때로는 노래방, 고스톱이 이어지는 게 한국의 문화인지라 그때 나에게는 불안과 고통을 잊게 해 주는 최고의 정신 치료제였다. 돌아보면, 그때 시름을 잊게 해 주고 나를 살린 건 골프였다.
이민을 결정하고 잔뜩 겁먹은 채 가족들과 낯선 타국에 도착한 뒤, 나에게 닥친 첫 장애물은 영어였다. 말이 돼야 뭐라도 할 것 아닌가. 당장 정부 ESL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도시락을 싸들고 매일 나가봤지만 이 나이에 단어 몇 개 더 외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해도 될 것 같지가 않아 학교는 포기하고, 집 근처에 있는 동네 골프장을 기웃거리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이곳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골프하고 맥주 마시며 1년이 되고 2년이 지나니 기적같이 조금은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영어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밑천이 되었고 이것도 골프가 아니었으면 가능할 수 있던 일이 아니다.
준비 없는 이민생활이란 게 막막할 수밖에 없고 한국에서 겪은 일로의 울화나 살아갈 일에 대한 걱정들로 힘들 때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집을 나섰다. 벤 승용차에 간단한 취사도구와 골프채를 싣고 떠나는 혼자만의 여행에 재미를 붙이면서 갈 때마다 새롭고 큰 세상을 만났다. 밴쿠버의 BC주를 떠나 앨버타주와 삼스카츈주의 광활한 지역을 달리다 보면 대자연의 웅대함에 가슴이 뛰고 이름 모를 골프장을 걸으며 아름다운 꽃과 개울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다 보면 세상의 온갖 시름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크고 새로운 이 나라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보고들은 모든 게 뒷날 생업의 발판이 되었고 그 모든 것 또한 골프 덕분이었다.
마음 주고 돈도주고 몸도주지만 언제나 '님은 먼 곳에' 다. 평생 골프를 따라가지만 골프는 결국 사람을 배신한다는 말도 있다. 2019년 10월, 1년 회비가 꽤 되는 이곳 골프장의 부부 회원권자격이 끝나면서, 골프에 흥미도 잃은 나는 드디어 매년 해오던 회원권 갱신을 더 이상 않기로 했다. 얼마 후 비회원 자격으로 골프장 프런트에 선 나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과 마주쳤다. 나의 회원자격은 2026년 까지 7년이나 연장되어 있었고 이 골프와의 끈질긴 인연 앞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 이후 2년째, 나는 이 '감사한 사무착오'에 대한 항의를 미룬 채 낯익은 프런트 직원이 반기는 골프장을 향해 다시 가방을 싼다.
나에게 골프가 없었으면 지금 살아있기나 했을까. 오래 했고, 노력해도 잘하지 못하고 심지어 싫기까지 한 골프지만 돌아보면 언제나 내 인생의 한 부분이었다. 골프를 통해 인연이 시작되었고, 어려운 고비를 넘겼으며 사업의 기회를 가졌고 힘들 때마다 위로를 받았다. 지금도 골프는, 세상 밖으로 가는 통로이고 창구이면서 늘 친구처럼 곁에 있다. 싫다고 버릴 일도 아니고 버린다고 버려지지도 않는다. 이제는 골프를 스코어나 승부가 아닌, 그저 '햇살과 바람 가운데서의 걷기'일 뿐으로 애써 생각하지만 그래도 속마음은 왜 잘 치고 싶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