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ve a nice trip"

by 육동녕

나는 성을 좋아한다. 전생에, 영주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사였든가 아니면 마굿간 지기였는지 모르겠다.


오래된 성벽과 망루, 더러는 무너진 돌무더기이지만 그곳에는 역사가 있고 묵묵한 세월의 이끼 속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애환과 목숨을 건 전쟁의 함성도 들리는 듯 하다. 역사와 사람들에 얽힌 성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여러 개의 나라로 갈라져 수백 년 동안 싸움을 계속해 온 영국에는 수많은 성들이 있고 대부분 돌로 쌓은 성들이라 보존도 잘 되어있다.


언젠가 가 보고 싶던 차에 ‘영국 자유여행’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싼 값에 열흘쯤 기간으로 차를 주고 영국 전역의 B&B에서 묵을 숙박권을 준다니 마음대로 다니며 보고 싶은 성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 망설이는 아내를 달래 떠나기로 결정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숙박권과 아침식사만 있지, 나머지 식사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주로 현지에서 사 먹게 되겠지만 열흘 동안 햄버거만 먹을 수는 없다. 생각 끝에, 라면과 햇반, 버너와 코펠 등과 함께 버너의 연료를 담을 생각으로 보온병보다 조금 큰 플라스틱 휘발유통도 준비했다.


휘발유는 기내 반입이 안되니 영국에서 운전하는 동안 주유소에서 넣으면 될 것이다. 런던의 개트윅 공항에 내려 여행사에서 알려준 창구를 찾으니 마치 스파이영화에서 처럼 우리 이름이 적힌 봉투를 받았는데 봉투 안에는 영국지도와 숙박권, 그리고 자동차 키가 들어있었다. 가이드도 없이 지도만으로 영국 시골을 누빌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영국에서의 자동차 운전은, 운전석도, 길의 차선도 카나다와는 모두 반대라는 건 알고는 왔지만 지정된 장소에서 막상 차를 받아 운행을 시작하면서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우선, 우측 운전석과 수동변속의 차에, 우측이 아닌 좌측 도로운행인 데다 길은 좁고 이곳의 차들은 고속이다. 온통 신경을 집중해도 오랜 운전습관 때문에 언제라도 사고가 날 수 있다.


무모한 '영국 성 둘러보기' 욕심때문에 선택한 자동차운전이,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내는 걱정이 태산이다. 우리는 런던 외곽에 숙소를 정한 다음, 이틀동안 기차와 전철을 이용해서 윈저궁이나 런던 타워 등을 돌아본 다음, 지도를 점검하며 내일부터 지방의 성들을 둘러볼 계획을 세웠다.


런던에서 출발하여 두 시간 만에 도착한 리즈 성은, 군데군데 무너진 성벽 사이로 퇴색한 황갈색의 목조 문양이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오리와 백조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성을 둘러싼 호수와 잘 정돈된 넓은 정원이 있는 이 성은, 500여 년 전, 우리가 잘 아는 헨리 8세와 스페인 데레사 왕비, 앤 볼린 왕비의 이야기들이 있다.


이런 역사에는 무심할, 견학 온 어린 학생들은 연못가에서 뛰어놀고 커피잔을 든 시민들의 오후 산책이 한가롭다. 리즈 성에서 동쪽의 캔터베리 대성당과 로마인이 건설했다는 영불해협의 도버 성을 거쳐 우리는 세찬 바람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 영국 남해안의 Folk stone에서 두 밤을 지낸 다음, 가 보고 싶던 ‘보디엄’ 성으로 출발했다.


14세기에 지어진 잉글랜드 남부 east sussex지역에 있는 보디엄 성은, 난공불락의 해자와 정교한 중세 건축미로 유명한데 Folkstone에서는 영국 남부지역의 B2607길을 따라 4시간 거리다. B2607길은, 지방도로인데도 커브가 심하고 의외로 교통량도 많아 오른쪽 운전이 생소한 우리는 영국 남부의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즐기는커녕, 극도의 긴장 속에 내내 운전에만 집중해야 했다.


우리는 ‘보디엄’ 성을 한 시간 가량 앞두고 작은 마을 Tenderden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주유를 하기로 했다. 나는 주유기를 손에 든 채로 오늘 밤부터 사용 예정인 버너 연료통을 꺼냈고 아내는 무료했던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차에서 나와 연료통을 받쳐 들었다. 휘발유를 채울 때 넘치지 않을까 각정에 우리는 연료통입구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주유기를 연료통 입구에 집어넣고 핸들을 당긴 순간, 거센 압력으로 뿜어지는 휘발유가 연료통을 돌아 솟구쳐 오르는 바람에 우리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우리는 온통 휘발유를 얼굴과 온 몸에 뒤집어쓴 채로 눈을 뜰 수 없었고 비명소리에 놀란 점원이 뛰어나와 우리를 화장실로 부축해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물로 눈을 씻어주었지만 이미 잔뜩 눈에 들어간 기름은 물로 씻겨질 일이 아니었다.


"이건, 병원아니면 할수 없는 일이다." 정신없는 가운데서도 나는 인도인 점원에게 마을 병원의 위치를 물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어렵게 차를 운전한 끝에 간신히 마을 병원에 도착했으나 병원시간은 이미 지난 뒤였다. 기름에 범벅이 된 얼굴을 감싸 안은 채 응급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우리에게 한 여자가 다가와 우리를 멈춰 세웠다.


이름이 Nancy인 여자는, 근무를 끝내고 평소보다 좀 늦게 퇴근하던 길이었고 접수절차를 생략한 채 우리를 감싸 안아 뛰다시피 응급실로 이끌어 눕힌다음 즉시 진료를 시작했다. 아마도 알코올 같은 세척 용액을 탈지면에 적셔 조금씩 닦아내는 처치였는데 몇 번 닦아내고 나서 눈 안의 남은 기름 농도를 검사하여 수치를 다시 확인하는 방식으로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끈기 있게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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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기름 농도가 안전수치임을 확인했을 때는 세 시간여가 지나 밖은 어둑해 져 있었다. 알고 보니 낸시는, 이 병원 의사로, 얼굴을 감싸고 뛰어드는 우리와 마주치자 퇴근을 포기한 채 우리를 치료해 준 것이었다. 늦도록 퇴근 못한 낸시에게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으로 더듬더듬 치료비를 물어보자 낸시가 말했다. “Have a nice trip!”


그리고 Nancy는, ‘치료가 조금만 늦었어도 눈을 크게 다칠 뻔했는데 운이 좋았다’고 했다. 오후 5시가 넘은 시간, 늦게 퇴근하던 Nancy를 못 만났거나, 만난 Nancy가 우리를 그냥 지나쳤더라면? 당직의사도 없다는 이 시골의 작은 병원에서 외국인 여행자가 필요한 절차를 밟고 의사를 기다렸다면 이렇게 빠른 처치는 어려워 틀림없이 우리 두 사람의 시력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마치 우리를 위해 퇴근을 미루고 기다려준 듯 , 그리고 정성을 다 해 치료해준 Nancy에게 우리는 깊이 감사했다. 천천히 운전하여 east sussex에 도착했고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름다운 ‘보디엄’ 성을 둘러보고 나오며 아직 눈이 불편해 운전이 더 힘들어진 우리 부부는 자동차를 조기 반납하기로 합의했다.



영국 시골의 성들이 아름답긴 하지만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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