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중동경기가 한창이고 취업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때, 그때 기준으로는 꽤 대우가 좋다는 회사에 입사원서를 내고 서류심사를 거쳐 필기시험 붙고 나서 보니 동기생이 17명이었다. 이 동기생들과 함께 같은 날 회사생활을 시작했고 IMF혼란 속에서 회사 문을 닫은 1998년까지 한 건물에서 20년을 넘게 얼굴 맞대고 생활한 것만도 보통 인연이 아닌데 그중 한 가족을 이곳 밴쿠버에서 만나 또다시 20년의 이민생활을 같이하고 있으니 그와는 아마도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었나 보다.
우리 가족이 이민 보따리와 함께 밴쿠버에 도착해 보니 이 동기생은 우리보다 몇 년 먼저 정착해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가 언제, 어디서 침술을 배웠는지 모르는 채로, 익숙한 회사 직함 대신 남들 부르는 대로 이름에 '원장'을 붙여 부르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김 원장이 입사동기라는 말은 조심하기로 했다. 한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쉽다는 침구사 면허를 따서 이민사회에서 한국사람들을 대상으로 생업수단 삼아 개업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 원장이 원래 한의사가 아니고 나와 함께 직장생활을 오래 했다는 게 좁은 이민사회에 소문이라도 나면 그의 영업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민 초기, 김 원장 부부의 성의를 다한 초대를 잊지 못한다. 종일은 준비했을 법한 저녁상도 좋았지만 가족이 각자 제 자리를 찾은 듯 짧은 시간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 몹시 부러웠고 앞으로의 이민생활에 대한 불안감에 잔뜩 겁먹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느라 마음 쓰던 부부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민생활 20년 동안, 김 원장네와는 이사 가면 집들이 초대도 하고 아이들 결혼식도 참석하고 그리고 다른 옛 직원들과 함께 야외모임도 가지는 등, 서로 왕래하며 편안한 이웃으로 지내는 게 좋았는데 김 원장네가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건 얼마 전 한의원에 진료 가서야 처음 알았다.
내심 김 원장의 한의술을 못 믿어하는 나지만 허리 통증이 있을 때면 침도 맞고 차도 한잔하며 얘기도 나누는 재미로 김 원장 한의원을 찾곤 했는데 진료 후 차를 마시던 김 원장의, '곧 이사할 계획이고 병원문도 곧 닫을 예정이다’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왜 갑자기? 어디로? 좋은 동네의 아담한 집은 이미 팔았고 병원도 인수할 사람을 정했으며 이사 가는 곳은 밴쿠버와 밴쿠버섬과의 중간에 있는 '솔트 스프링스'라는 섬이라고 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페리도 직행이 없어 3시간이나 걸리는 섬으로 왜 갑자기 이사를 가나, 아이들과 손주를 이곳에 두고 부인은 순순히 따라나설까. 김 원장은, '이제 누구나 노후를 준비할 시기이며 조용한 섬에 가서 약초나 재배하는 게 계획'이라며 부인은 아직도 반대인데 같이 가는 문제는 본인의 선택에 맡기겠단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곳 밴쿠버도 너무 조용하고 외로워 걱정인데 더 조용한 곳으로?'
'한국사람도 하나 없으니 무인도나 다름없는 곳으로 따라가야 하는 부인 맘은 어떨지?' '아마 한의원 운영이 어렵거나 아니면 무슨 부동산 투자기회가 있든가 나에게는 말 못 할 일이 있는가 보다.' 굳이 캐 물을 일이 아니었다. 얼마 후 살던 집과 한의원을 넘긴 김 원장은 임시로 있을 월셋집을 정해놓은 다음, 섬에 집을 짓기 위한 건축자재를 며칠에 한 번씩 트럭과 페리를 이용해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언제 한번 가 봐야지’하면서도 좀체 기회가 없었는데 마침 5월에 밴쿠버 섬에서의 결혼식에 참석할 일이 생겼다. 밴쿠버 섬에서 김 원장이 사는 스프링스 섬에 가기 위해서는 배를 한번 더 타야 하지만 시간만 잘 맞추면 잠깐 만나본 뒤 돌아 나와 당일로 집에 돌아올 수도 있다.
그동안 궁금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던 우리가 결혼식 참석을 마치고 김 원장 집에 도착하니 넓은 집 터의 오래된 낡은 오두막 뒤로 작은 목조주택을 지어놓았는데 김 원장은 부인과 함께 목조주택의 마무리 공사에 매달려 기진맥진 상태였다. 흙은 여기저기 파 헤쳐진 상태였고 집도 허름해 보여 바다가 보이는 좋은 전망의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상상했던 우리는 조금 실망한 채로 가벼운 인사만 나눈 채 서둘러 배 타러 나오며 서로에게 물었다. '좋은 집 팔고 왜 이곳으로 이사해서 저 고생이지?'
다음 해 1월, 10년을 넘게 키우던 레트리버 애완견 '쨍이'가 우리 곁을 떠났다. 가족과 다름없던 쨍이가 가고 나니 집 곳곳에 쨍이의 모습이 안 보이는 데가 없고 언제라도 튀어나와 안길 것 같은 착각에 집에 있는 하루가 큰 고통인 상태에서 우리 부부는 김 원장네를 생각했다. '어디면 어떠냐, 잠시 어디든 멀리 집을 떠나 있다 돌아오자'
다행히 김 원장네와 연락이 돼서 우리는 섬으로 향했는데 도착해 보니 목조로 지은 집은 어설픈 대로 완성이 되어있고 마당도 정리되어 지난번 같은 어수선한 느낌은 없었다. 반가워하는 김 원장 부부와 함께 오래된 시내와 아름다운 바닷길도 걷고 차도 마시면서 우리는 쨍이를 잃은 위로를 받고 편안함을 느꼈다. 우리가 저녁밥상을 받았을 때 밥상 위의 야채나 반찬이 모두 그들 부부가 재배한 것이라는 걸 알고 놀랐다.
김 원장 부부와 처음으로 밤을 같이 보내며 들은 얘기는 더욱 놀라웠다. 김 원장은, 오래전 직장 재직 시절부터 평소 한의학에 심취하여 인간의 생체를 연구해 왔는데 부인 말에 의하면, 한의서를 보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침술을 공부할 때는 자기 몸을 치료 대상으로 삼아 밤마다 스스로에게 침을 놓아 그 부위에 따른 느낌을 기록하고 부황이나 침뜸도 같은 방법으로 실험을 하다 보니 온 몸이 성할 날이 없어 차마 보기 어려웠다고 했다.
실제로, 통증으로 걷기도 어려워 수술을 예정했던 부인의 무릎도 김 원장의 침술만으로 치료해서 완쾌되었다니 옛 드라마에서 보던 명의 허 준을 보는 느낌이었다. 김 원장은, 한의술을 스스로 공부하고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는 먹거리를 직접 재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섬에 들어왔다고 했다.
온갖 농약과 비료로 재배된 작물에 조미료로 길들여진 요즈음의 음식 대신, 건강한 흙에서 농약이나 비료 없이 땀 만으로 야채나 과일을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김 원장에게 세상의 다른 것들은 사소해 보였다. 그는 그럴만한 토양과 기후조건을 생각해 많은 곳을 후보지로 검토했고 그중 자신을 유혹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리고 연중 일조량이 가장 많은 이 섬을 선택했다고 했다.
물때 좋은 날의 해변엔 조개나 굴은 지천이고 해초는 채취해서 거름으로 쓰기도 한다. 김 원장은 농사일에 매달리는 한 편으로 이곳에서 한의원을 열어 어쩌다 찾아오는 이곳 서양사람들을 대상으로 진료도 한다. 처음, 힘들어하던 부인도 자연 속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바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다. 향기 가득한 저녁상의 그 많은 반찬 하나하나를 설명하는 부인의 말에는 자랑이 있었다.
김 원장의, 섬으로의 이사는 단순히 농사나 먹거리 때문만이 아니었다. 김 원장은 시끄러운 거리의 골목에 있는 한의원에서 무료하게 손님을 기다리거나 또는 진료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이 원하는 노후를 꿈꾸었고 최선책을 찾느라 생각을 거듭했으며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결심한 바를 실행했다.
이민생활의 치열했던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도 한참 전 집을 떠나고 난 후 가끔 외로움을 느끼면서 아내의 핀잔 속에 한국을 기웃거리는 내가, 자랑삼아 한국의 이중국적이나 의료보험, 또는 '부분 거주' 계획을 입에 올려도 김 원장은 관심을 보인적이 없었다. 그는 떠나온 한국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했고 이곳 도시와 그리고 아이들과도 떨어져 자신의 남은 시간을 살고 또 죽을 곳을 택해 배를 타고 이곳에 온 것이었다.
나의 입사동기 김 원장은 내가 생각했던 돌파리 한의사가 아니었다.
그날 밤 우리 앞에는 초로의 신선 부부가 우뚝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