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 맹 씨의 유래는 중국 노나라에서 계출 된 성씨로 맹자 40 세손 맹승훈이 당나라 말 공자의 상(像)을 모시고 신라로 이주해 온 것에 기원하여 한국계 시조로 삼고 있다.
맹사성 선생의 본관인 신창(新昌) 맹 씨는 고려 이부전서를 지낸 맹의를 1 세조로 하여 맹사성은 맹의의 4 세손이라고 한다.
아버지 맹희도와 권근은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고, 맹사성은 권근의 문하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실제 내린 글씨를 후손들이 현판으로 새겨 만든 '어필사액현판'을 본다.
충효세업(충과 효를 대대로 힘써 오다)
청백가성(청렴과 결백을 가문의 명예로 삼다)
가히 가문의 영광이니 대대로 고이 간직할 글씨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문불출 ' 이란 말이 생긴 유래다. 맹사성 조부가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으로 두문동에서 순절하자 아버지 맹희도는 모든 벼슬을 버리고 온양으로 거처를 옮겨 후학을 양성했다.
고려 말 권문세가 가문과 왕족 중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에게 항복하지 않고 벼슬을 거부한 채 은거한 곳이 두문동이라 하였고 지조를 지키다 모두 순절하였다. 오늘날 집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하게 된 고사성어가 생겼다. 그런 슬픈 사연을 알게되니 씁쓸하다 .
기념관을 나와 멀리 앞산을 조망하면서 탁 트인 공간에 집은 작게 짓고 나무는 크게 심었다는 생각이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이 타인을 위해 나무를 심는 사람의 마음처럼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정치가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