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잃은 여자

by 소봉 이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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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문제는 국민의 역린이다. 요즘 군대 병가 문제로 사회가 혼란스러우니, 아들 훈련 보냈던 소회를 적었던 글을 소개한다.


큰애가 입대를 했다. 겉으로는 대범한 어미인 척 하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설상가상으로 삼십년 만에 찾아 온 추위라고들 야단이다. 이상하리만치 겨울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더니 뒤늦게 이렇게 추위가 찾아 온 건 어인 심술인지 모르겠다. 내놓고 걱정을 할 수 없는 것이 이 년이나 군에 보낸 엄마들도 있는데 사 주 훈련을 가지고 엄살떨다간 몰매 맞을 것 같아서다.

연일 방송되는 기상 예고는 “내일은 더 춥겠습니다.”이다. 평소에 반듯한 몸가짐과 좋은 목소리에 호감이 가던 기상캐스터가 얄밉기만 하다.

밤마다 엎치락뒤치락 잠을 잊은 열흘을 보내고서야 잘 지낸다는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 연휴가 끼어서 사나흘씩이나 늦게 도착한 것이다.

첫째 주는 취사담당이었다니 뜨거운 국물을 엎지르는 상상으로 아찔했다. 눈이 많이 와도 백 여 명이 치우니 금방 연병장이 훤해진다는 자랑에는 양말이 젖어 동상이라도 걸릴세라 염려스럽기만 했다. (참고로 그 애는 그후 삼 년간 스키 타러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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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음 주에는 사격 연습이 있어서 기대된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나는 등에 땀이 밴다.

보초를 설 때는 얼굴을 자주 문질러라. 손등을 자주 마찰시켜라. 축축한 곳에서 잠들지 마라. 몸이 약한 군우를 배려해라. 군대라는 특수상황을 인정하여 어떠한 모순에도 인내하도록 해라. 등등 편지를 보내고 나면 못다 한 말이 있어서 쓰고 또 쓰다 보니 무려 다섯 통이나 보냈다.


사실은 할 말도 많았지만 “너희들은 지금부터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라며 호된 기압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라, 그런 날이면 혹시 엄마의 편지가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해서 더 자주 써 보낸 거다.

아들을 훈련소에 보내고 나니 감기 몸살이 심해서 설에 시댁에도 친정에도 못가고 말았다.

밤마다 꿈에서는 화장실에서 초코파이 먹는 아들을 보고, 유격훈련을 받고 와서 흙투성이로 앉아 “낳으실 제 괴로움”하며 울먹이는 아들을 본다. 얼마 전에 TV에서 그런 프로를 본 탓이다.

그런저런 웃지 못 할 일들을 겪으며 4 주가 지났다. 마중을 나갈까 하니 여자 친구가 온다고 나오지 말란다. 조금은 서운한 감도 있지만, 바로 집으로 오는 것만도 어딘가.

어떤 친구는 제대하는 아들을 환영하려고 풍선을 불고 색종이를 자른 꽃가루를 한 바구니 준비해 두었는데, 해가 꼴깍 넘어가도 소식이 없고 식사를 같이 하려고 모인 온 가족은 기다리다 지쳐 저녁을 굶고 잠이 들었단다. 어스름 새벽이 되어서야 골목이 떠나가도록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 .” 하며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떡이 되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하는 말이다.


짐 정리를 하다 보니 편지가 많이 나왔다. 걱정으로 얼룩진 엄마의 편지도 있고, 섬섬옥수로 그리움을 읊조린 여자 친구의 편지도 있다

‘흐흥, 똑같이 다섯 통이라 이거지’ 라며 야릇한 경쟁의 속내가 솔솔 기어 나오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일까. 한 편으론 아들애가 어렵고 외로울 때 편지를 많이 보내줘서 사랑스럽고 고마우면서도 머리 따로 가슴 따로는 또 무슨 억지일까.

나에게서 차츰 독립되어 가는 아들을 보며 인생의 어떤 거스를 수 없는 질서에 숙연해진다. 퍼질러 앉아 내가 보낸 편지를 다시 읽는다. 좀 더 서정적이고 멋스럽게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자고 막무가내로 어미의 본능만을 마구 내뿜었는지 얼굴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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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친구의 아기자기한 핑크빛 그림으로 사랑 가득 정성 가득한 예쁜 봉투를 보는 순간, 평범함이 지나쳐 너무도 사무적인 흰 규격 봉투와의 대비는 나의 여성성의 부재를 일깨운다.

모처럼 달게 자고 눈을 뜨자마자 용수철처럼 튀어 나간다. 평소에는 일어나라고 성화를 대는 남편에게 투덜거리며 일어나는 물색없는 주부지만 오늘은 다르다.

명색이 훈련을 받고 왔는데 아침 식사를 제대로 챙겨주겠다는 심산이다.

우선 비타민 보충을 해 주어야겠다고 사과를 녹즙기에 넣고 무심코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게 되었다.

머리카락은 하늘을 향해 제멋대로 뻗어 있고, 파자마를 아무렇게나 입은 나의 모습은 완전 성(性)을 잃은 여자였다. 급한 김에 화장대 앞에 앉지도 않고 주방으로 달려 나온 탓이다. 항간에 ‘미친X 프로젝트’ 라는 도발적 화두를 던지며 활동하는 페미니스트 사진작가에게 피사체가 되지 않으려면 어미의 본능을 자제하며 잃어버린 성을 찾아야겠다.

아들아이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엄마를 더 좋아하게 될테니까.


사랑하는 아들을 이 년이나 나라에 바치고도 의연하게 기다리는

이 땅의 위대한 어머니들께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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