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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Apr 01. 2024

못 죽는 기사, 안 죽는 기사

루시, 〈못 죽는 기사와 비단 요람〉




영웅은 일반적인 사람을 뜻하지는 않는다. 신화와 서사시의 주인공인 영웅들은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며 거대한 자연의 위협과 공포로부터 자기 존립의 가능성을 되묻"는 이들이었고, 근대의 영웅들은 "비범한 능력과 도전 의지로 자연의 제약이나 인간 삶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명 창조의 모험담"¹을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비범한 능력을 가졌든 그들 또한 인간이기에 한계가 있으며, 웅장하고 위엄있는 모습 뒤에는 그림자가 있다. 3인칭으로 노래할 때는 영웅의 고통마저 위대하게 보이지만, 1인칭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순간 영웅 또한 숨길 수 없는 초라함을 가진 한 인간이 된다. 〈못 죽는 기사와 비단 요람〉은 영웅의 1인칭으로 고백되는 인간의 삶, 그리고 그 인간을 살게 하는 동력에 대한 이야기다.





LUCY

ㄴ〈못 죽는 기사와 비단 요람〉(2024, LUCY 7th DS '못 죽는 기사와 비단 요람'












숨을 쉬지 않는 땅
끝에 걸려 있는 저 달빛이 만든 길을 따라
도대체 얼마나 멀리 지나왔는지
이 길은 끝없이 영원하단 걸
뭐가 됐든 상관없다는 듯 쇠들은 철커덕거려

다음이란 의미 없는 소리
살 위를 춤추는 벌
뭘 바라더라도 내려놓으란 듯이
날아드는 해가
나와
내 안에 끌어안은 반
영원함을 말한 이 손을
내게선 떼어놔야만 하는데

그만 가
나의 모습처럼 난
흑연과 강철의 괴물이니까
외로운 괴로운 발걸음은
넌 없어도 되니까 없어야 하니까
이젠 가 날 두고 떠나가
너는 빛을 담는 요람이니까
지켜준 건 내가 아닌 너야
내 사랑아 내 파도여
너는 너의 밤을 가렴

무너지는 폐허 위
타올랐을 열기 속을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잔향 따라
무심히 걸어가
날 움직이게 해준 맘
변화를 약속하는 눈을
내게선 떼어놔야만 하니까

그만 가
나의 모습처럼 난
흑연과 강철의 괴물이니까
외로운 괴로운 발걸음은
넌 없어도 되니까
없어야 하니까
이젠 가
날 두고 떠나가
너는 빛을 담는 요람이니까
지켜준 건 내가 아닌 너야
내 사랑아 내 파도여

널 괴롭힐 거니까
망가질 테니까
너 없는 세상을 걸어가야 하나
느려지다 멈춘 다리
쓰러져 넘어가는 하늘

처음 올려다본 별 길은
되게 느렸구나

가지 마
나와 네 약속처럼
나는 죽지 않는 너일 테니까
외로운 괴로운 그날들에
우리 둘이었으니까

그래 나와 너의 모습들은 다
똑같은 강철의 요람이구나
바라온 건 너와 나 우리야
내 사랑아 내 파도여

다음이란 의미 없는 소리
살 위를 춤추는 벌
뭘 바라더라도 내려놓으란 듯이
날아드는 해가
나와
내 안에 끌어안은 반
영원함을 말하는 널
놓지 않아
녹이 슬어 무너져가는 나라도 괜찮으면
같은 밤을 걸어가자

이 길의 끝 따라


*곡 소개에서 보면 '못 죽는 기사'는 "루시의 음악적 신념과 리스너에 대한 자신들의 사명감의 비유"라고 한다(멋지다 루시 파이팅!!). 이 글에서는 '영웅'에 초점을 두고 또 다른 방법으로 가사를 읽어보려고 한다.





〈못 죽는 기사와 비단 요람〉은 제목 그대로 못 죽는 기사의 노래다. 다른 누군가가 그를 노래하지 않고, "끝없이 영원"한 길 위에서 지치고 녹이 슬어버린 기사 본인이 화자로 등장하다. 아마 누군가 그를 바라봤다면 못 죽는 기사가 아니라 죽지 않는, 안 죽는 기사로 그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고백에서는 못 죽는 기사가 된다. 한 시대를 구하고 사라진 위인이 될 수 없었고, 박제된 영웅이 되어 영원할 것만 같은 길을 달리다 너절해진 기사. 4분 남짓의 노래는 그가 어떤 이유로 영웅이 되었고, 그가 살아가는 세계가 정확히 어떤 곳인지 다 들려주지는 않는다. 필연적으로 영웅의 서사시는 그가 사는 세계관을 담아내지만, 이 노래는 서사시가 아니라 '비단  요람'을 향한 기사의 고백이기에 그가 살아가는 세계는 흔적으로만 가사에 존재할 뿐 구체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오늘은 가사에 있는 단서들을 바탕으로 못 죽는 기사와 비단 요람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려고 한다.



1. 죽지 않는 기사, 못 죽는 기사


'못'이라는 부사는 어떠한 행위를 할 수 없음을, 능력의 부재를 나타난다. 즉, '못 죽는' 기사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기사다. 죽을 힘이 없다. 타고나길 죽을 수 없는 존재였는가? 여기에 긍정을 해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나는 그가 처음부터 "흑연과 강철의 괴물"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 기사가 정말 위대하고 용맹하던 기사, 괴물이라는 말과는 아주 거리가 멀던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대륙을 통일한 위대한 제국, 모든 전쟁이 그치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영웅이자 기사. 위험한 전투를 몇 번이고 이겨내고 살아돌아온 그를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죽지 않는 기사다!"


그러나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 지루할 만큼 길어지는 평화 속에서 기사는 자신이 발 붙일 곳을 잃었을 수도 있다. 모두가 그를 원했으나 전쟁이 그친 평화로운 땅에서는 누구도 그를 원하지 않으며, 무르고 풍요로운 땅은 영원한 평화를 노래하는 시대. 넘쳐흐르는 평화로움 속에서 홀로 고독한 그는 이런 소원을 빈다.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면 좋겠다." 이것은 다시 대륙이 전쟁의 불구덩이로 빠지기를 바라는 악독한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외로웠고, 자기 자리를 찾고 싶었던, 한 시절을 보내고 스러진 영웅의 토로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이루어지고 만다면?


기사가 소원을 빈 그날부터 "숨을 쉬지 않"게 되어버린 땅 때문에 풍요가 저물고 결핍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랜 풍요를 누려온 세대가 쉽게 무너지고, 남의 것으로 나의 배를 채워서라도 살아남으려는 시도들이 전쟁이 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다시 일어난 전쟁의 불길과 비명을 들으며, 기사는 그제야 자기가 빌었던 소원을 문득 떠올리고 만다. 혹 그날 내 머리 위로 별똥별이 지나갔던가? 소원이 이따위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말았는가? 엄습하는 공포 속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소원을 빈다. "이게 만약 내 잘못이라면 책임질 수 있는 힘도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한때의 전우들과 함께 전장으로 달려간다. 그가 닿는 곳에는 순식간에 전쟁이 멎지만, 한 마을에 평화가 이르면 저편에서 다시 연기가 치솟는다. 기사가 닿는 곳에만 평화가 있다. 떠난 후에는 또 불길이 치솟는다. 소모전에 가까운 사명을 반복하는 사이 곁에 있는 전우들은 떠나거나 스러지고, 기사 또한 지치고 만다. 이제는 내 삶을 거두어 가시라 빌며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않지만, 심장을 꿰뚫어야 마땅한 화살은 강철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구겨진 채 그의 발밑에 떨어진다. 기사는 그제야 투구가 벗겨지지 않음을 깨닫는다. 죽을 수도 없음을 안다. 그렇게 "흑연과 강철의 괴물"이 된다. 



2. 빛이 드는 요람, 강철의 요람


종종 전쟁이 멎고 평화가 찾아와도, 숨을 제대로 쉬지 않는 땅은 필연적인 결핍을 가지고 있기에, 이제 먼 옛날이 되어버린 영원한 평화와 풍요로움 같은 건 찾아오지 않는다. "얼마나 멀리 지나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사명에 목을 매단 채 끌려다니는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살 위를 춤추는 벌"을 받는 길이다. 전장에 쓰러진 시신들, 흩어진 살점 위를 춤추듯 오가며 사는 인생. 그러다 마주친 비단 요람. 


그는 아이를 "빛을 담는 요람"이라 부르고, 빛을 담는다는 말이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가리키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그 아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가 아니었을 것 같다. "빛을 담는 요람"은 기사가 아이를 처음 만난 풍경의 일부를 묘사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무너지는 폐허 위, 타올랐을 열기 속", 그 풍경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것처럼 찬란히 쏟아지는 달빛 아래 놓인 요람을 만난 것이 첫 만남이 아니었을까. 빛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비단 요람. 그리고 그 속에 있던 아이. 특별한 것 하나 없었지만, 무르고 여리고 연약한 것들에 약했던 기사가 반쯤은 충동적으로 아이를 데리고 같이 떠났을 것만 같다. 너무 작고 연약해서 곧 죽을 것만 같으니, 죽지 않을 만큼 자라면, 아니, 그저 아직 평화가 남은 마을에 이르면 이 요람을 두고 가야지. 그런 다짐이 반복되며 아이는 조금씩 자랐고, "변화를 약속하는 눈"으로 기사를 바라봤을 것이다.


사실 아이가 약속하는 "변화"와 말하는 "영원함"은 그렇게 특별한 무엇이 아니었을 것 같다. 이번에는 산에 있었으니 다음에는 바다 쪽으로 가보자고, 오늘은 풀만 먹었으니 내일은 다른 걸 먹었으면 좋겠다고. 사명에만 매달려 살던 기사에게 주어진 전혀 다른 삶의 방향은 고작 이런 크기였을 것이다. "다음"이라는 말이 "의미 없는 소리"가 되어버릴 만큼 시간에 무뎌진 그가 아이와 함께 있으면서는 다시 영원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환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이 영원하기를,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을 생각하며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영원하기를. 당연히 내일이 이어지리라 믿는 아이의 마음은 영원에 한없이 가깝기에.


사명이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아이. 아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기 위해 때로는 전장을 피하고, 연기가 치솟는 곳이 아니라 한적한 마을에 들어서는 기사.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내며 아이는 기사에게 "내 안에 끌어안은 반"이 되었을 것이며, 동시에 "그만 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애틋해졌을 것이다. 사랑하는 만큼 제가 지고 가는 사명을 나누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를 "내 사랑", 녹슨 삶에 밀려든 "내 파도"라 부르면서, "지켜준 건 내가 아닌 너"라며 귀히 여기면서도 떠나 보낸다. 


늘 유예하던 작별을 한 번은 실행에 옮겨봤으리라. 어느 날 도달한 유독 평화로운 마을, 푸근한 인심의 사람들, 마치 기사의 소원 전 영원한 풍요를 누리던 땅을 닮은 곳을 마주쳤을 때, 그는 "뭘 바라도 내려놓으란 듯 날아드는 해"의 전언을 기사는 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손을 붙들고 떠도는 삶을 주고 싶지 않아 아이를 두고 떠나지만, 그는 결국 아이 없이 버틸 수 없음을 깨닫는다. 


너 없는 세상을 걸어가야 하나
느려지다 멈춘 다리
쓰러져 넘어가는 하늘
처음 올려다본 별 길은
되게 느렸구나
가지 마


그리고 아이는 단 한 번도 자신을 떠나겠노라 말한 적이 없다는 것 또한 기억한다. 그렇기에 말할 수 있다. 가라는 말 대신 해야 하는 건 자신의 진심이었다. 가지 마. 그 세 글자를 토해내지 못해 헤맸던 그는, 이제 급하게 달린다. "느려지다 멈춘 다리"에 다시 힘이 들어가고, "쓰러져 넘어가는 하늘"이 다시 허공에 단단히 매달리며, "되게 느"리게 흐르는 별 길을 아주 빠르게 되짚어 돌아갔으리라. 오늘은 그가 돌아올 거라 매일 마을  입구를 서성이며 기다리던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가지 말라고 말했을 것이다. 품에 안은 아이가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을 것이다. "외로운 괴로운 그날들"을 보내면서도 한 번도 떠나려 하지 않았던 아이는 "빛을 담는 요람"임과 동시에, 기사를 닮은 "강철의 요람"이기 때문이다. 이제 기사는 떠나라는 말 대신 아이의 손을 붙들고 걸으며 이렇게 말한다.


영원함을 말하는 널 놓지 않아
녹이 슬어 무너져가는 나라도 괜찮다면
같은 밤을 걸어가자
이 길의 끝 따라



3. 안 죽는 기사


이제 다시 여정을 떠나는 기사와 요람의 끝이 어디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기사는 '못 죽는' 기사가 아니라 '안 죽는' 기사다. "영원함을 말하는 널 놓지 않"겠다는 결의는 곧 죽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겨우 살아내며 못 죽는 상태로 헤매던 때는 이제 끝났다. 빛을 담는 요람, 저와 꼭 닮은 강철의 요람을 손에 쥔 기사는 이제 안 죽는 기사다. 지킬 것이 있고, 목숨 걸어 지키는 일이 기꺼울 만큼 사랑하는 기사는 무너지더라도 달려갈 수 있다. 녹이 슬어도 죽지 않는다. 언젠가 아이가 자라 강철의 기사를 업고 달리는 날이 오더라도 좋다. 기사는 못 죽는 것을 괴로워하기보다는, 아이가 사는 영원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할 테니까. 못 죽는 기사가 되어 녹슬며 낡아버렸던 영웅은 아이의 손을 잡을 때 비로소 다시 아이의 영웅이 된다.


누군가의 손을 영원히 붙들고 달리고 싶어질 때, 모두가 영웅이 된다.







참고문헌

¹박형준, 「영웅서사의 해체와 사건의 존재론」,『오늘의 문예비평』107, 오늘의 문예비평, 2017,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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