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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Mar 28. 2024

끝까지 힘주어 사랑하기

루시,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몰랐거나, 아무것도 모른다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사실은 이미 다 알고 있었거나. 이런 깨달음의 순간은 평이한 일상의 한 순간을 이루기보다는 커다란 사건이 되어 삶을 가르고 지나간다. 돌이킬 수 없는 경계선처럼. 


오늘의 노래는 이 경계선에 대한, 그리고 '이미'와 '결국'을 거쳐가며 사랑하는 누군가의 이야기다.






LUCY

ㄴ〈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2021, 2nd EP 'BLUE'

ㄴ〈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2022, 1st Full Album 'Childhood')






지금 아래 두 곡을 발매 순서대로, 혹은 끌리는 순서대로 들어보고 아래 글을 읽어 보시면 좋겠다. 물론 각각 'prequel'과 'sequel'로 영제가 붙어 있어 순서가 결정된 것도 같지만 직접 들어보고 왜 그 곡이 'prequel'이고 'sequel'로 인지 알게 되는 건 또 느낌이 다르니까. 이미 아는 곡이어도 순서를 신경 쓰며 한 번 들어보시면 재미있을 것 같다. 아래 이어지는 내용은 결국 이 두 곡 중 무엇을 먼저 들어야 서사가 잘 맞는가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Sequel)〉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기나긴 시간 쭉 함께하자고
하루하루를 함께 그려냈지
영원할 것처럼

고된 하루도 힘들진 않았어
네가 웃으면 다 괜찮아져서
매일 그날의 장면을 되감아
여기 나 홀로 남아

영화 속에 열린 결말처럼
영원할 순 없나 봐
어디서부터 어긋난 버린 걸까
난 여기 있는데

너와 나의 사랑
그 뒷이야기를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널 사랑한 시간마저
낡은 테이프처럼
바래져 잊혀지는 거 그것만은 싫어

가고 싶은 곳 해보고 싶은 것
너와 약속한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 아득히
이젠 붙잡을 수 없을 만큼 점점 멀어져 가

못다 한 말들이 너무 많아
쉽게 널 못 잊나 봐
텅 빈 거리에서마저 너가 보여
가슴이 아려와

너와 나의 사랑
그 뒷이야기를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널 사랑한 시간마저
낡은 테이프처럼
점점 잊혀져 가는데

너가 없는 내 삶엔
아무런 내용도 없는데
이대로 난

멈춰버린 시간
우리의 이야기
여기서 끝이라곤 생각하기 싫어
그 뒤를 이어보려 해
같은 맘이라면
긴 여행을 다 끝난 뒤에 봐
예전처럼 문을 열고 달려와서
내 품에 안긴 채로 꼭 말해줘
다녀왔어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Prequel)〉


젖은 바닥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라
풀잎이 향을 채우고
이슬 섞인 듯 햇빛이 내 눈을 감기고
그댈 놓쳐서 헤매던 날
둘이 사라져 가는 노을을 보며
분명 옆에 있는데도
혼자인 것 같아

우리의 시간, 추억 다 보내야 한다는 건
난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그냥 한 번만 한순간 망설여도 될까요
마지막 한 번 더
그댈 보고 싶어

이 계절은 의연히 기억을 깨우고
곧 다가올 이별을 더 피하게 해
내가 싫어도
네가 놔버리면
다 의미 없는걸
저 파란 하늘도
눈에 띄게 멀어지는
노을빛이
나만 여기 두고서
널 데려가나 봐

우리의 시간, 추억 다 보내야 한다는 건
난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그냥 한 번만 한순간 망설여도 될까요
마지막 한 번 더
그댈 보고 싶어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아요
이대로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나요
언젠가
가야 한다 해도
마지막처럼
얘기하지 마

우리의 사랑
기억 다 보내야 한단 건
난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그냥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안아봐도 될까요
그런 표정으로 슬퍼하지 말아요
다시 돌아올 그날까지
그리곤 말할게
어서 와요






서사에서는 사건의 순서가 중요하다. 사건의 내용이 같아도 무엇이 먼저 일어났느냐에 따라 이어지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A(=사랑에 빠진다)와 B(=비밀이 밝혀지고 서로를 미워한다)라는 사건이 있다고 할 때, A와 B의 내용이 변하지 않아도 A-B(사랑에 빠졌으나 비밀이 밝혀지고 서로를 미워하게 된다)와 B-A(비밀이 밝혀지고 서로를 미워하게 되었으나 사랑에 빠진다)는 완전히 다른 결로 흘러간다. 전자는 아무래도 새드엔딩이 가까워 보이고, 후자는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에 닿을 것 같다.


그래서, 이미 제목부터 '결국-이미', '아무것도-다', '알 수 없었지만-알고 있었지만'으로 서로 맞물리며, 아마도 하나의 이야기를 이룰 것 같은 두 곡을 어떤 순서로 들어야 더 벅차오를지를 고민했다. 보통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 보듯 발매일 순서대로 들어 보는데, 이 두 곡은 먼저 발매된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을 뒤에 듣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앞서 언급했듯 영제도 'Sequel'이지 않은가. 그리고 결국-이미'라는 말의 뜻을 따져봐도 그렇다.


이미: 다 끝나거나 지난 일을 이를 때 쓰는 말. ‘벌써’, ‘앞서’의 뜻을 나타낸다

결국: 일이 마무리되는 마당이나 일의 결과가 그렇게 돌아감을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둘의 의미 차이는 이렇다. 현재 시점으로부터 이미와 결국을 따진다면 이미가 과거 방향으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결국은 현재 시점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이미'는 손에서 이미 떠난 것, '결국'은 내가 결국 손에 쥐게 된 것. '이미-결국'으로 순서를 정리하고 나면, 두 곡의 제목에서 충돌하는 부분이 더 보인다. '이미-결국'은 순서를 맞춰 하나로 연결할 수 있겠지만, '아무것도-다', '알 수 없었지만-알고 있었지만'처럼 반대되는 말들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려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바탕으로 두 가지 이야기가 가능하다.


1.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착각이었다.

2.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과 이미 다 아는 상태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어야 나머지 하나가 진실이 된다. 처음 깨달은 것은 진실이 아니고, 나중에야 진실을 깨닫거나 고백하는 플롯을 염두에 두고 다시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의 가사를 살펴보자.


젖은 바닥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라
풀잎이 향을 채우고
이슬 섞인 듯 햇빛이 내 눈을 감기고
그댈 놓쳐서 헤매던 날
둘이 사라져 가는 노을을 보며
분명 옆에 있는데도
혼자인 것 같아

우리의 시간, 추억 다 보내야 한다는 건
난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그냥 한 번만 한순간 망설여도 될까요
마지막 한 번 더
그댈 보고 싶어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에서 화자(이후 '그'라고 부르겠다.)는 "우리의 시간, 추억 다 보내야 한다는 건 난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둘이 사라져 가는 노을을 보며" 앉아있는데도 "혼자인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의 시간 추억 다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별을 코앞에 두고 부정하는 대신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한 번만" 망설이고 "마지막 한 번 더" 그댈 보고만 싶다고 고백하는 그는 더는 작별을 돌이키거나 모든 것을 막아 세우고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고 하진 않는다. 


다만 곡의 끝에서 기다림을 다짐하며("다시 돌아올 그날까지 그리곤 말할게 어서 와요"), 마침표 뒤에 새 문장을 쓰지 않은 채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서, 혹여 그대가 돌아오면 전해줄 말을 연습한다. 작별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토해내며 당신은 내가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으냐 묻고, "언젠가 가야 한다 해도 마지막처럼 얘기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지만, 결국 그가 맞이하는 결말은 헤어짐이며 기다림이다. 다시 돌아올 그날을 막연히 기약하며 그대를 보내는 마음은 '이미'에서 묻어나는 체념이 깊게 묻어 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에서의 그는 결국에서 묻어나는 체념과 반대로 걷는다.


너와 나의 사랑
그 뒷이야기를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널 사랑한 시간마저
낡은 테이프처럼
바래져 잊혀지는 거 그것만은 싫어


너가 없는 내 삶엔
아무런 내용도 없는데
이대로 난

멈춰버린 시간
우리의 이야기
여기서 끝이라곤 생각하기 싫어
그 뒤를 이어보려 해

같은 맘이라면
긴 여행을 다 끝낸 뒤에 봐
예전처럼 문을 열고 달려와서
내 품에 안긴 채로 꼭 말해줘
다녀왔어


사랑한 시간이 "낡은 테이프처럼 바래져 잊혀지는" 게 싫다고 말하는 그는 단지 다 끝난 사랑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사람이 아니다. 만약 그가 후회하며 사는 사람이었다면 그대가 떠나간 일, 그리하여 혼자 남은 일,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 그런 과거들이 싫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널 사랑한 시간마저" 잊혀지는 것, "그것만은" 싫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는 네가 나에게 돌려줄 수 있는 어떠한 사랑을 기다리는 태도를 넘어, 잊지 않겠다는 결단이자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결단하는 능동성이다.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도록 닫힌 문을 억지로 힘주어 열어보려는 시도다. 그때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는 것은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결말과 새로 쓸 이야기의 교차점이 된다. 그는 이 교차점을 지나가며 "그 뒤를 이어보려"는 곳까지 나아간다. 이를 악물고, 힘주어 사랑한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나는 앞서 세웠던 두 개의 가설 중〈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에게 진실의 자리를 주고 싶다. 끝난 이야기를 힘주어 이어보려던 시도 앞에서〈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의 모든 문장은 체념하려 스스로 속이며, 혹은 떠나가는 당신에게 부담을 얹지 않으려 했던 거짓말이 된다. "마지막 한 번 더 그댈 보고 싶"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겨우 한 번으로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안아봐도 될"지를 묻는 속내에는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공백이 뚫렸을 것이다. "우리의 시간, 추억 다 보내야 한다는 건 난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다 안다는 것은 입으로만 하는 말에 불과했을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한 정도는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결국 왜 다 보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시간과 기억을 끌어안고 '결국'에 이르지 않았겠는가.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에서 순전히 진심인 문장은 딱 하나다. "어서 와요" 이것만이 그의 진짜 소원이었다. 그렇기에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의 마지막 소원은 당신이 돌아와서 해주는 "다녀왔어"라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언젠가 어서 오라고 인사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다녀왔다고 먼저 말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어서 오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다고.


두 곡을 이어보면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나는 이미 이 작별을 다 알고 있었다고, 아주 작은 것 하나만 남겨달라고 애원하던 한 사람이 제 손으로 택한 기다림 속에서 바래가던 당신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린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은 거짓말이고, 나는 이 작별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고. 둘 모두 등을 돌려야 작별이고 누구 하나라도 붙들면 그게 사랑이기에, 나는 작별을 알 수 없다고. 내가 설령 당신 없는 거리에서 당신을 볼 만큼 앓더라도, 낡은 테이프처럼 바래지는 당신을 놓지 못하고, 모두가 끝났다 하는 뒷이야기를 이어볼 만큼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서러울 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그가 떠난 당신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이 작별은 예견되었을지언정 의도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여러 노래를 듣다 보면 떠난 사람이 정말 밉고 나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가 이토록 사랑하는 당신이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당신이 돌아와서 해야 하는 말이 어떠한 사과나 후회도 아니고 단지 돌아오는 그것, "다녀왔다"는 인사면 충분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아무래도 당신 또한 절대로 떠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녀왔다는 말을 돌려줄 수 없을 곳으로 가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떠나는 얼굴이 사무치게 슬퍼, 조금만 더 남아 있어 달라고, 한 번만 더 안아달라고 하던 그가 결국 "그런 표정으로 슬퍼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도 더 이해가 된다. 떠나고 싶지 않았던 당신과 남아버린 그.


그럼에도 이 두 곡이 그저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굳건하고 힘 있는 사랑 이야기로 마무리 되어서 좋다.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에서 과연 그가 끝까지 살아 어서 오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구석이 있었다면, 〈결국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에서는 그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분명 아직 그는 울고 있고, 다녀왔다는 말을 할 당신이 그리워 종종 무너지기도 하겠지만, 뒷이야기를 이어보려 힘주어 사랑하는 그는 절대로 스스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힘주어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힘주어 살아가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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