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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gerun May 14. 2022

푸석하고 목이 메는 바나나의 맛

여기 책상 위 노트북 옆에 흔하디 흔한 바나나가 하나 놓여 있습니다. 색이 선명하고 싱싱하니 먹음직스러워 냉큼 한 뭉치 사 들고 왔어요. 5개에 2,000원도 하지 않는 바나나를 보니 어린 시절 그때가 떠오르네요. 초등학교 시절 면역력이 약했던지 일 년의 절반 이상은 감기 등의 잔병치레를 하느라 부모님 속을 꽤 괴롭혔어요. 한두 달 지독한 감기를 앓고 나면 이번엔 또 양쪽 눈이 감기지 않을 만큼 다래끼로 눈이 퉁퉁 부어오르고요. 그러다가 좀 살겠다 싶으면 시도 때도 없이 코피가 터져 거즈 솜은 늘 쟁여두어야 하는 우리 집 상비약 상위권에 속했죠. 그런 식으로 일 년 내내 어딘가가 삐걱거리는 비쩍 마른 어린 딸을 돌보는 부모님 마음이 어땠을지... 어른이 된 지금 어느 정도 짐작은 가지만, 아이를 낳은 경험이 없는지라 정말 제대로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어요. 그래도 고생스럽고 마음이 늘 무거웠겠구나 싶어요. 그런데 왜 바나나에서 얘기가 여기까지 왔을까요?



요즘도 몸살이 나거나 물에 젖은 솜덩이처럼 몸이 무거울 때면 이불속을 헤매다가 문득 머리맡을  쳐다보는 습관이 있어요.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왠지 끙끙 거리는 동안 누군가 바나나 하나를 놓고 가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곤 해요. 왠지 생각만으로도  나은  같기도 하고요. 수시로 아프던 어린이 시절에 바나나는  비싼 과일이었죠. 평소엔 엄두도  내는 금값의 수입 과일이다 보니 어쩌다 먹어보면  폭신하고 달콤한 맛에 사르륵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죠. 그런 귀하고 값진 과일이 끙끙 앓다가 눈을 떠보면 가끔 베겟닛 옆에 놓여있곤 했어요. 어린 딸이 몸져누워있으니 평소 좋아하는 것을 주고 싶으셨겠죠. 맛있는  먹고 얼른 나아 일어나라는 소망과 함께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편도선이 퉁퉁 부은 채로 한두  먹고 내려놓던 바나나의 맛은 달콤한 기억으로 남은 적이 없네요. 텁텁하고 목이 메어  먹어지지가 않았거든요. 가끔은  아플  먹었다면 맛있을 텐데... 철없이 먹다 남은 바나나를 보며 속상해했던 기억도 나고요.



빈약하던 시절을 지나 건강한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부터 바나나 값은 친숙해졌으니, 손쉽게 사 먹게 되면서 더 이상 머리맡에 놓인 바나나를 애타게 쳐다볼 일은 없어졌죠. 그럼에도 바나나는 여전히 마음이 허하거나 몸이 무거울 때면 생각이 납니다. 바나나의 달콤함 안에 폭신하게 녹아있는 부모님의 애달픈 애정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흔해졌다 해도 흔해지지 않는 기억 속의 포근한 바나나맛. 아프면 알약 한알 털어 넣고 자면 되지만, 문득 생각만으로도 한 번씩 크게 포옹해주는 그 맛.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흘러도, 목이 메고 푸석하게만 느껴지던 그 맛이 저에겐 가장 달콤한 바나나의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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