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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비두비두밥 Oct 18. 2023

1. 교수님께 메일 보내는 법

2023.09.06

 교수님은 몰랐으면 하는 사실들이 있다. 순진한 후배를 낚을 의도로 쓴 강의평(과제가 할 만하고 퀴즈도 주마다 한 번뿐이에요), 낮에 수업할 때 그렇게 졸던 우리가 밤에는 무얼 하는지(게임, 야식, 쌓여가는 과제에 대해 걱정하기). 


 학교 커뮤니티에 시험 기간마다 올라오는 날 것 그대로의 절규는 법적으로 교수님들이 보지 못하게 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교수님의 여린 마음을 다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험 기간에 올라오는 진심 아닌 농담들.jpg


 학생만의 비밀은 요즘 위태롭다. 젊은 교수님들은 학교 커뮤니티의 존재를 아는 데다 강의평을 읽어보기까지 한다. 대학원생들을 통해 알아내는 교수님도 있다. 나는 서로 지킬 것은 지키며 살고 싶다. 예의나 적절한 선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의 하찮고 소중한 비밀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태로운 것은 학생의 비밀뿐만 아니었다. 내 가치관과 신념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여름이 물러가던 9월 6일 지도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나는 내부고발자 체험을 하는 중이었다. 어떤 주제로 말하다 이야기가 샜다. 나에게는 대화 중에 침묵이 3초 이상 이어지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는 버릇이 있었다. 진작 고쳤어야 했는데 안타까운 사태가 벌어졌다. 잔뜩 긴장한 나는 그만 교수님께 비밀을 술술 불었다.


이런, 어쩌다 이렇게 됐지?


"...그래서 교수님께 메일 드리는 양식이 있기도 합니다."


 교수님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내가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 양식은 선배가 후배한테 주는 건가?"


"에브리타임이라고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로 보긴 했습니다."


 얼빠진 상태로 학교 커뮤니티의 이름까지 상세히 설명드렸다. 뱉은 말은 못 주우니 아예 내 혀를 묶어버렸어야 했다.


"아, 나도 알지."


 어떻게 아시는 거지? 나는 바보 같은 질문을 꾹 삼키고 불안하게 눈치를 살폈다. 침묵이 또 3초 이상 이어지려 했다. 이번에는 간신히 아무말 대잔치를 시작하려는 충동을 억눌렀다.


 교수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대화 주제를 찾으시는 중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머릿속에서 열심히 행복 회로를 돌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아직 하늘이 멀쩡해서 그런지 솟아날 구멍도 통 생기지 않았다.


"그럼 메일 보내는 양식은 무슨 내용이지?"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비밀의 실체를 밝혔다.


"메일을 인사말, 본문, 마무리로 나눠서 처음에는 신원과 수강하는 강의를 밝히고. 본문에서 목적을 정확히 전달한 후에 마지막에 감사 인사는 꼭 하는 식입니다. 제가 본 것은 그런 팁이었습니다."


 또 잠시 생각을 하던 교수님의 입가에 미소가 두둥실 떠올랐다.


"어쩐지."


"네?"


"내 전공 수업을 1학년이 듣잖니. 지금까지 각기 다른 학생이 보낸 서로 다른 내용의 메일 세 통을 받았는데. 어째 메일들이 다 비슷하더라고, 내용과 무관하게."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꾹 참았다. 고심하여 메일을 보냈을 불쌍한 신입생들에 대한 슬픈 생각을 하며 웃지 않으려고 했다. 나도 그리 떳떳하지 않았기에 마냥 마음 놓고 웃을 수는 없었다. 


 연구실 밖에 나오자마자 메모장에서 메모 하나를 휴지통으로 보냈다.


'교수님께 메일 쓰는 법'


 학교 커뮤니티에 올라온 팁을 복사해 둔 메모였다. 내가 신입생일 때 저장해 뒀는데 그동안 요긴하게 쓰여 왔다. 전공 교수님께 질문을 드리고 교양 교수님께 공인 결석 인정을 받을 때마다 그 메모는 내 든든한 친구였다.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된 것 같았다. 메모에 적힌 '꿀팁'들은 내게 너무 당연한 점이 되었다. 첨부파일명은 어떤 식으로 하는지, 참조와 숨은참조가 어떻게 다른지, 왜 답장하기 기능을 써야 하는지. 3학년이 되고 나서는 메모를 보지 않고도 막히는 곳 없이 메일을 썼다. 보조 바퀴를 뗀 자전거가 더 빨리 달리듯 말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휴지통을 비웠다.


 그렇게 메모 하나를 떠나보내자 조금 더 자란 기분이었다. 비록 교수님께 학생들의 비밀을 들켰지만, 여전히 메일 첫인사와 마무리 인사를 어떻게 다르게 할지 매번 고민할 테지만. 더할 나위 없이 뿌듯했다.


 메모를 적으면서 나는 새롭게 배웠고 메모를 지우면서 나는 한 발짝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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