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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변유변 Jul 25. 2023

남은 20년, 그 이후로 20년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까



# 꽃 위에 비가 내리면

드문 드문 나무 사이에 피어있는 남국의 붉은 꽃들이 젖는다. 싱가포르 발코니에 비가 내린다. 점심밥을 준비하려 물을 올려 두었다가 이내 가스불을 껐다. 젖지 않게 소파를 안쪽으로 밀고 장막을 조금 내렸다.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풍경 속에서 남은 날들을 정리해 본다. 4년은 유의미한 시간이다. 마흔을 바라보는걸 생각하면 삶에서 거의 십분지 일을 여기에서 보냈다. 귀임이 머지 않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상대적인 흐름. 나는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다가 앞으로 무얼 할지 고민해 보았다. 


명확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이들은 행복해 보인다. 하고싶은 일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고싶은지 곰곰이 탐색하기 보다는, 그저 눈 앞에 닥친 일들에서 작은 성공을 거두기에 급급했다. 구체적으로는 제도권 안에 있는 내가 편안했고, 자연스러웠다. 나를 성장시키는 내적 동기와 외적 요인을 잘 구분하는 편이 아니었고, 솔직히 그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어느 덧 아이들이 생기고 내 시간이 흐르는 것 보다 빨리 그들이 자란다. 아이들이 내게 와 준 지금에는 늘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것도 중요하겠지만,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것을 구분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면에 귀기울여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목표라는 것은 주어지기도, 또 스스로 설정하기도 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 보고, 너희들이 이 다음에 커서 그런 일을 찾았으면 좋겠다. 아마도 그 일은 지금 우리 깜냥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 지도 모른다. 그만큼 세상은 빨리 변하고, AI와 크립토를 얘기하지 않더라도 내 상상력은 한계가 있다. 


그나마 효과적인 방법은 옆에서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더 자주 나부터 돌아 보고 싶었다. 그것을 동력삼아 다음으로 나아가려고.



#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까.

국제기구에서 일해 본 경험은 참으로 값지다. 외국에 살아보는 일도, 다양한 배경에서 온 동료들과 함께 일해본 일도 처음이다. 우리는 더 안전한 세상을 위해 협력한다는 공동의 가치를 공유했다. 막연하게 상상했던 일들을 실제로 마주했고, 불가능하리라 믿었던 일을 함께 이루어 왔으며, 집단지성이 주는 힘을 믿게 되었다. 


거기에서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내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조건의 삶을 상상한다. 조직에서의 안정감과 자격이 안겨주는 자부심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라는 존재를 마주했을때 적나라하게 드러날 내 역량을 생각해 본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세상에 나를 증명하고 또 그 과정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오늘 내어놓은 답이 정답이 아니어도 괜찮다. 또는 답을 아예 구하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을 위로하고 싶다. 우리는 대개 과거 어느 때인가 생각했던 모습으로 살고 있다. 비슷한 방법으로 다음 20년 후를 조금 먼저 고민해 보면 어떨까. 


아침 나절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싱가포르에서의 4년을 반추한다. 붉은 남국의 꽃이 비에 씻겨 내려가듯 이런 생각들이 흘러가 버리기만 할까봐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정제되지 않은 표현으로 기록한다.


점처럼 많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 나라는 존재가, 적어도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인류가 되었어야 할 텐데. 

주어진 기회만큼이나 나태하지 않고 그 시기를 놓치지 않았어야 할텐데. 

게으른 나를 잡아당기는 조바심과, 괜찮다는 위안 사이에서 고민하는 오늘의 나. 


- 2022년 9월, Holland Rd, Singapore


우리나라에서는 비가 오면 꽃들이 지는데, 여기에선 젖었다가 마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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