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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imoriho May 18. 2022

오전 7시의 사유

밤의 놀이를 마치며.







여기, 모든 나뭇잎들의 살랑임을 봐.



그 유려한 자태는 하프의 연주만큼 부드럽고, 섬세하다.



모든 생명이 새벽의 남은 공기를 마시고, 나뭇가지를 문 까치가 저어 멀리 둥지로 날아가고, 태양이 세상을 환히 비추며 아침의 문을 여는 지금 이 순간,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도 나를 위한 곳임에 틀림없다.


지난밤 태양은 우리를 용서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밤의 소문을 들은 걸지도. 저기 한 젊은이가 있다, 겁먹은 아이처럼 한숨도 못 자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러나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아침을 맞으러 이곳에 왔다, 고.


태양은 그러한 내게 더욱 따스한 빛을 내뿜는다.


나는 이른 아침에 고작 동네의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밤의 놀이를 마치고 이제 막 7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이따금씩 잔잔한 바람이 불었다. 그러다 머리 위에서 찰랑거리던 나뭇잎들 중 하나가 내 팔 위로 살포시 떨어져 앉았다. 나는 잎에게 물었다.


푸른색이 희미하구나. 왜 벌써 노란 잎이 되었니?


내 낡은 노트 사이에 그 조그만 잎을 껴 두었다. 잎에 대한 동정은 아니었다. 그저 제 역할을 다한 잎이 사랑스러워 보였을 뿐. 그리고 나는 곧바로 펜을 꺼내어 잎을 끼워 둔 페이지에 글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봐. 나는 이 작은 잎마저 사랑해서 그냥 두지 못하고 고이 간직하려 한다.’  


햇빛과 옅은 그림자가 나의 종이 위에서 함께 춤을 추었다. 그 모양새를 보다 문득 해를 보려 고개를 하늘로 들었을 때, 수많은 나뭇잎들 사이에서 찬란의 빛으로 위장한 위대한 실루엣이 보였다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눈이 부시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태양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 그 위대한 실루엣이 순백의 춤사위를 보이며 말했다.


아니야, 찬란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야. 위대함은 존재 자체에서부터 비롯되는 거야. 우리는 어떻게 찬란해지는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해 생각해야 해. 존재의 골짜기 깊은 곳 구석 하나하나까지. 찬란한 것은 이미 그 깊은 곳에 있어.


그러자 높은 하늘이 내게 말했다.


어이, 지금 이 푸르름을 좀 봐! 오늘의 내가 구름을 간직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새들이 내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지, 내가 어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래. 고작 그 벤치에 앉아서 일단 보기만 하란 말이야. 그럼 너도 알게 될 거야. 어제도 오늘도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나는 언제나 높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그 사실 하나만은 변하지 않지. 그러니 작은 것들, 저 밑에 있는 사소한 것들은 괜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때, 하늘을 가로질러 가던 새 한 마리가 나를 힐끔 보더니 나무에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하늘은 모르는 것이 있어. 만약 하늘이 매일같이 높게 펼쳐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고 에워싸는 것들의 상태까지도 그와 같을 수 있을까? 저 하늘은 본질은 변하지 않더라도 우리 같은 작은 존재들로 인해 매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 텐데 말이지. 중요한 것은 매번 다른 모습이야. 마치 너의 아주 작은 생각들로 인해 너의 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말이야. 저 하늘도 그걸 간과했다가는 모든 것을 잃을 거라고... 그런데도 과연 저 하늘은 작은 것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작은 생각으로 인해 하루가, 나의 전체가 흔들리는 것…’


저 멀리서 바람이 조용히 불어왔다. 그리고 함께 실려온 꽃내음이 말했다.


어쨌거나, 모든 일은 우연으로 시작되었어. 그리고 이 세계는 우연과 우연으로 빚어진 거야. 세계는 마치 청자와 같아. 어떤 모양의 청자는 술을 담아 사람들이 마시게 하고, 어떤 모양의 청자는 꿀을 담고, 또 꽃을 꽂아 두고, 누군가가 누울 수 있는 베개의 역할을 하고, 악기가 되고, 모양도 제각각이지. 청자들은 그저 각자의 역할을 다할 뿐이야. 네가 내게 생명의 물을 주고, 나는 너에게 깨달음의 향기를 주는 것처럼 말이야.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제 역할이 있지. 그러니 저 하늘도 새도, 모든 것이 가치 있는 거야.


조용한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그러자 여러 꽃들의 향기가 뒤섞였다. 이번에는 바람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거야. 작은 우연과 또 작은 우연. 그들은 각자 자리에서 무언갈 하고 있겠지만, 그것은 필히 연결되어야만 해. 그래야만 가치 있는 거야.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연결되지 않고서야 절대 아름다울 수는 없어. 꽃과, 새, 하늘과 태양, 이 세계와 네가 형성되는 것 전부. 모든 것들이 연결되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거야.

잠깐, 지금 이 소리가 들리니? 소리를 잘 들어봐. 조용히 지나가는 것들이 중요할 때가 있어. 이렇게 지나가는 것들도 너와 연결되기 때문이지.


바람결을 따라서 연못의 물결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바람의 말이 맞아. 우리는 시간에 따라 흘러가지만 결국 어딘가에 다다르게 되지. 영원히 흐르는 것은 없으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늘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이 세계가 우연과 우연으로 빚어진 것이든 아니든, 연결된 모든 것을 네가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미지의 아름다운 것은 오직 너만이 알아볼 수 있어. 이 세계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결국 너의 흐름 안에서 만나고, 화해하는 것이니까. 세상이, 하늘과 태양이 어떻고, 누구와 연결되어 있든지 간에 너는 찰나의 순간을, 그와 함께 번뜩이는 빛을 포착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말이야.


이번에는 흘러나오던 노래의 따스한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며 말했다.


내 목소리는 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와 네 목소리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어. 혹여 내가 너를 안아주거나, 절망과 환희의 순간을 함께 해줄 수는 있겠지. 하지만 너는 새들과, 개울과, 풀과, 개와, 고양이와, 사람과 대화를 나눠야 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의 목소리를 들어.


손을 잡고 풀 사이를 지나던 노부부가 말했다.


사랑. 사랑. 사랑을 해라. 사랑 아니면 무엇을 할래? 모든 것은 사랑만이 답이야.


나는 그렇지, 하고 우리 집 강아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득히도 먼 곳에 있는 나의 집과 나 자신 같은 존재 하나를 떠올렸다. 또 아주 강렬한 색채들과 낯선 곳들을 떠올렸다. 엇비슷한 세계의 바다들과 숱한 유혹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를 잠재우던 그의 연주와 그것과 교차되는 초라한-하지만 절대로 초라하지 않은-나의 연주를,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시커먼 내 마음속으로부터 참지 못하고 튀어나온 문장 하나 하나와 그에 얽힌 책의 구절들, 심지어는 나의 목소리를 내는 저 작은 존재들, 그 모든 사소한 연결들을 떠올렸다.


노부부는 아주 천천히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서 시선을 뗀 건 그들이 향하는 돌길 끝에서 태양빛을 향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어머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간절히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것을 바라지 말아라. 그 어떤 것에 대한 것도 바라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하지만 희망은 있어야 해. 오직 너 자신에 대한 희망 말이야. 그것은 절대 버려선 안돼.


순간, 나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나는 비뚤거리는 글씨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힐끗한 시선이 느껴졌다. 한 노인이 머지않은 곳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렇게 말했다.


계속 글을 써라!


그러고는 절뚝거리는 다리로 저 반대편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노인이 조금씩 내게서 멀어지고, 나무 뒤로 모습을 거의 감추었을 때쯤에 나는 두 눈을 감았다. 태양과 그 빛을 비롯한 모든 존재들이 밝고 쨍한 붉은색으로 형상되어 내 눈앞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러다가,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어떤 중요한 순간을 느끼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바란다고 해서 보이는 게 아니야. 물론 스치는 많은 순간들 중에 번뜩이는 현상과 더불어 어떤 깨달음이 있을 순 있지.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야.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너의 것으로 기억하고, 담아두어야 해. 너는 그 사소한 것들을 단 한 개도 버려선 안 돼. 너는 그것을 아주 오랫동안 오랫동안 지켜보고, 바라야 해. 그래야만 어느 찰나의 순간에 한데 모인 해답을 얻을 수 있어. 사실 모든 불행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작된 거야. 하지만 너는 그 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릴 수 있어. 지난 불안의 밤처럼 과거에 의존하고, 또는 미래에 끌려가고 할 테지. 하지만 계속해서 기억해야 해. 너의 순간들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해두었다가 꺼내어 보고, 또 다른 작은 것과 연결시키고...


나는 그 자리에서, 숱한 존재들의 목소리와 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또한 깨달았다. 이들의 목소리는 나의 마음 어디 깊은 곳에서 움츠리고 있었던 나의 목소리였으리라.


나는 다짐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오늘 나는, 나의 시야에 있는 것들을, 나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모든 순간들을 하나씩 수집하고 한데 모아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담아둘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도 그것들을 연결시켜 비로소 나를 완성시키는데 집중할 것이다. 다른 것들이 아닌 나의 존재를, 내 안을 탐구하는 데에 모든 힘을 다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나의 존재 자체로서의 위대함을 느꼈다. 불안의 밤에 휩싸였던 지난 모든 시간들, 부정과 거센 패기로부터 시작된 밤의 놀이, 그리고 길고 길었던 새벽을 거쳐 드디어,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을 깨달은 것이다. 오전 7시의 고작 이 작은 동네, 이 벤치 위에서. 아, 내가 0에서 1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거쳤던지! 내 자신이 감격스러웠다. 모든 것이-시야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신경을 스치는 사사로운 느낌과 반응들까지도- 유난히 명확하고 새롭게 느껴졌다. 나는 비로소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물음. 그것이 정말로 ‘새로운’ 것이었을까? 그때, 햇살의 가장 얇은 줄기가 내 마음 깊은 곳을 따갑게 관통했다.




이봐, 그 답은 너도 충분히 알고 있잖아.





이윽고 이 모든 순간들을 지켜보던 존재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어 갔다. 나의 부정으로 말미암은 염려와 아주 사소한 나의 연결들까지도. 서서히 내 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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