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어린이날과 연휴가 겹친 5월에 나는 거제의 여행을 계획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 차를 가지고 가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와 엄마와 함께했던 해금강의 추억을 내 아이와도 느껴보고 싶은 생각에 내디딘 발걸음이었다.
오래전
20살의 젊음은 미래에 대한
방향을 알지 못했고 나침반의 정중앙에
머물러 어느 쪽으로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걸 아셨는지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나를
거제도의 넓은 바다로 데려가셨다.
20살에 본 남해바다는 나의 막막하고 건조했던 마음에 시원한 냉수 한 사발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는 거 같았다.
지금 하는 좌절과 고민은 어쩜 아주 작은
생채기일 뿐이야..
덤덤하게 받아들여..
그 바다를 보고 온 뒤
내 마음에서 자라는 미래에 대한 걱정은
조금은 줄어들어 있었고
살다가 문득문득 마음이 지쳐버린 날에
그 바다는 언젠가 또다시 마주하고픈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었다.
2년 전 어린이날은 아이의 조숙증 치료를 앞두고
마음이 뒤숭숭하고 한없이 갑갑했다.
환경 탓인지 아이들은 2차 성징이 예전보다
훨씬 빨리 나타나서
그걸 병이 아닌 병처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아이에게 주사치료의 아픔만 주는 건 아닌지,
내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옳은 것인지 갈팡질팡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마치 내 잘못같이 느껴졌다.
여행을 핑계로 나는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현재를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 생각난 곳이 거제도 바다였다.
통영을 지나 거제로 넘어온 우리는 제법 큰 배를 타고 오래전 보았던 십자동굴과 거제의 푸른 바다와 마주했다.
맑고 깨끗함에 경이로웠던 바다는
그 모습 그대로 변치 않고 거기
있어 주었다.
배 위에서 느끼는 바닷바람의 전율은 온몸을 짜릿하게 감쌌고 모든 근심은 바람을 타고 달아나버렸다.
남편과 딸은 거센 바람을 맞으며 타이타닉의 주인공처럼 포즈를 취했다.
아! 다시 오길 잘했구나!
넓게 펼쳐진 바다의 웅장함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게 느껴지고, 오래전 그날처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은
어쩌면 하루하루의
시간들 속에서 차근차근 소리 없이
곧 지나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박 3일 동안의 여행 막바지에 우리는 숙소를 산책하며 느린 우체통을 발견했다.
지금 쓴 엽서가 1년 뒤에 다시 우리에게 도착하는 우체통이었다.
우리 가족은 여행의 감흥을 담은 엽서를 1년 뒤에 도착할 느린 우체통에 넣고 왔다.
1년 뒤엔 우리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궁금증과 기대감 그리고 지금의 염려와 여행의 즐거움을 고이 접어 1년 후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아파트 편지함에 그 엽서가 도착했다.
문득문득 기다리고 있었지만
때를 맞춘 5월 어느 날이었다.
우아! 드디어 도착했구나!
아빠는 무슨 말을 했을까?
우리 딸은 뭐라고 썼지?
그리고 나는?
1년의 시간을 간직한 편지가 두근두근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남편은 소중한 여행의 추억을 간직하자는 말을
전했고,
나는 조숙증 치료를 앞둔 딸에게 힘겨운 날들이 될지도 모르지만 잘 참아내고 1년 후엔 지금의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 됐으면 좋겠다고 썼다.
그리고 늘 사랑하게 만드는 우리 딸은
엄마 아빠께~~
이 편지를 쓰던 날을 기억할지 모르겠다고..
일 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하다고..
그리고 1년 후의 엄마 아빠께 1년의 세월과 추억을 담고 가겠다고 보내왔다.
1년 전의 시간이 전해준 애틋함과 따뜻함,
염려와 걱정,
기대와 궁금증이 묻어 있는 편지였다.
딸의 말처럼 편지는 1년의 시간들과 추억을 담아 1년 후에 도착했다.
1년 동안 우리는 평범한 일상을 채워나가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걱정했던 조숙증 치료는 큰 어려움 없이
잘 받고 있었고,
가끔 거제의 바다를 추억하기도 했다.
1년의 책갈피 속에는 즐겁고 힘들고
지루하고 아쉬움이 베여있는 날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코로나 시대 속에
답답하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오늘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너무 많이 걱정하고 염려했던
일들이나 후회할 만한 일들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뜻하지 않은 위기의 순간에 나는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최선을 다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미래는 시간이 지나 오늘이 되고
그 미래는 과거에 걱정했던 것보다는
오늘을 충실히 잘 채워주고 있으므로..
나의 마음은 다시
2년 전 거제의 넓은 바다 앞에 서있다.
그리고 느린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다.
그 편지에는
지금 시간들의 소중함과
앞날에 대한 희망이 적혀 있다.
설사 그 희망이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지금 걱정했던 오늘은
편지를 받을 1년 후에는 아무렇지 않을
시간으로 잔잔한 강물처럼 흘러갈 걸 알기 때문이다.
숙소에서 보았던 거제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