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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Jan 18. 2022

남은 생은 보너스

채사장 <열한계단>을  읽고

지난 한달여는 내게 힘든 시간이었다. 부부싸움을 했고, 오랜 전업주부생활로 낮아진 자존감이 더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고,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은 잘만 살아가는 것 같았고, 그런 나의 옹졸함이, 내 기준에서 정당하지 못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로까지 이어지며, 스스로 마음을 힘들게 했던 시간이었다.


그런 중에 이 책을 읽게 되었고, 결론적으로 이 책을 통해 그 복합적인 우울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종종 나를 구원해주는 책을 만나곤 했는데, 요즘의 부정적인 나를 구해올려준 참 고마운 책이다.



이 책에는 좋은 말들이 가득하지만, 핵심어를 굳이 꼽자면, "현실" 그리고 "구원"인 것 같다.





작가 채사장은 "현실"을 중시하는 사람같다.


철학을 공부한 적이 있는 나는, 흔히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현실과 동떨어져 사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겠다, 현실에 꼭 적용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채사장도 그런 느낌이었다. 철학을 공부하며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싶지 않아서, 현실을 꽉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듯한 느낌.


작가는 끊임없이 현실을 강조한다. 사유의 세계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고,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 "사상과 사유의 구름 속이 아닌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문장으로 그것을 표현하기도 했다. 작가는 신을, 이상을, 우주를, 죽음 이후의 세계를 사유하지만, 결국은 현실(대지)에 발 딛고 살아야한다고 결론을 맺었다.




그리고 작가는 그 현실에서의 "구원"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는 문학에서, 종교에서, 철학에서, 과학에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현실"에서의 "구원"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문학 <죄와 벌>의 로쟈와 소냐 중 소냐를 통해 구원의 방법을 생각해보고, 기독교에서 신(예수)에게 구원의 길을 묻기도 했고,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풀기 위해 불교를 공부하며 타자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자기자신으로부터의 구원을 배웠다. 작가는 <죄와 벌>의 소냐나 불교의 주체적인 인간을 이상적인 인물로 상정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불교의 건강한 인간상은 이후 나오는 니체 철학과도 결을 같이 했다.


니체는 중세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종식시키고, 다양성과 변동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작가가 중시하는 것처럼, 아니 니체가 먼저 중시했겠지, 현실과 인간을 중시한다. 구체적 현실, 현실의 건강함, 그리고 인간의 건강함을 강조하며, "신은 죽었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은 초인과 아모르파티!

초인은 "낙타-사자-아이"로의 변모과정을 거치는데, 사자는 "너는 해야한다"에서 "나는 원한다"로의 변화이고, 초인에 가장 가까운 아이는 "순진무구, 망각, 긍정성, 놀이, 출발" 등을 상징한다.

아모르파티는 "다시 한번더 이 인생, 그러니 순간을 살자"이다. (구체적은 내용은 꼭 책을 통해 읽어보시길) 그렇게 니체는 대지에서 순간을 사는 일을 중시했다. 늘 그렇듯 니체의 이 이야기는 내 가슴을 설레게 하고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


과학 부분은 내가 너무 어려워하는 분야라 사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의심해봐야 한다, 저항해봐야 한다는 그 정신만은 챙기고 싶다.


어쨌든 작가는 니체 철학을 통해서도, 과학 분야의 공부를 통해서도 "구원"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때까지가 작가가 대학시절 이야기인데, 안전한 대학생활을 하면서는 철학을, 과학을 공부하면서 구원을 상상하는 일이 가능하다. 하지만 알다시피 대학을 나온 사회에서의 그 구원의 길은 아득히 희미하고 멀다.





우주를 품고 군장교생활을 시작한 작가는 군생활을 하면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했다. 그러면서 이상과 현실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이상 부분에서는 체 게바라가 등장했는데, 사실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꽤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생각에 온전히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공부가 더 필요한 부분같다. 어쨌든 작가는 체 게바라를 이상적인 인간으로 상정했다.


그리고 현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통해 현실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작가는 마지막까지 답을 찾지 못하고 마르크스를 향해 따져 물었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면 현실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작가는 화를 내며 따져물었다. 그렇게 작가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분노하며, 현실과 타협? , 현실에 순응? 포기? 했다.



그러던 중에 작가의 삶에 큰 사건이 터졌고, 그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왜이렇게 삶은 가혹하냐고. 하지만 그런 가혹한 삶 또한 수용해야 함을 작가는 깨닫는다. (메르세데스 벤츠가 아닌) 메르세데스 소사를 통해.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극복하는 방법은 "수용"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찾기 위해, 작가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공부했다. <티벳 사자의 서>를 통해, <우파니 샤드>를 통해, 인간은 그 개인이 모든 것을 창조한 장본인이며, 모든 결정을 내린 주인공임을, 세상은 개인 마음이 창조한 것임을, 그래서 "이 세계는 나의 세계다"라는 결론을, 세계는 내 멋대로 만들어낸, 객관성이 없는 나만의 세계임을 깨닫는다. 결국은 "내 마음"뿐인 것이다.



작가는 열한계단을 올라와 (잠정적으로) 이 결론을 얻었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첫번째 문학 계단에서나 열한번째 계단에서나 일관되게, "주체적인 인간"을 통해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죄와 벌>의 소냐나 니체의 초인이나 <우파니 샤드>의 범아일여 모두는, 대지에 발딛고 그 대지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주체적인 인간"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는 서문에서 말했다. 인생을 산다는 건 내적 성장을 하는 것이라고. 그동안 우리는 전문인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된 노동자인 채로 살아왔다. 또 작가는 말했다. 나는 노동자로 살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고. 그래서 작가는 우리에게도 제안하고 있다. 노동자로 살지 말고 사유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그래서 삶의 자유를 누려보라고. 작가는 우리에게 그 내적성장의 삶을, 사유하는 삶을, 그래서 자유로운 삶을 제안하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인 것 같다.



그런데 꼭 그렇게 살지 않아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작가의 말대로 어차피 세상은 내가 만들어낸, 나의 산물이다. 이런 철학 등을 사유하지 않아도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처럼 따지고 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너무도 고맙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갈팡질팡 답답했던 내 마음이, 맑게 개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너무 좋았던 이유는, 이 책을 읽고 난 후 의식의 성장을 통해 자유로워짐을, 내가 느꼈기 때문이다.





남편과 부부싸움을 했고, 자존감이 떨어졌다. 이 현실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저 밥하고 청소하고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육하는 일만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해야하는 일"이었다.


니체 철학의 초인 부분에서, 초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사자는 "해야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고싶은 일"을 한다. 나도 초인이 되고 싶었기에 그로 가는 과정처럼, "해야하는 일"을 내려놓고 "하고싶은 일"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해야하는 일"을 적어보았다. 집안살림, 육아.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적어보았다. 복직? 창의적인 활동? 여행? 아니었다. 나는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일"을 가장 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은 내가 "해야하는 일"과 "하고싶은 일"은 많은 부분 겹쳤다. 나는 매일같이 아이둘과 함께 눈을 떴고, 일어나자마자 아이둘 쉬를 누이고, 사과를 깎아서 먹이고, 아침을 준비해서 먹였다. 중간중간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줘야했고, 싸우면 중재해야했다. 그런데 그 일들이 "해야할 일"일 때에는, 그 모든 과정이 무거웠다. 내 마음 한 구석에선 나같은 고급인력(?)이 쉬를 받아내고, 사과를 깎는 일만 해야하나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하고싶은 일"이 되니 쉬를 누이면서 아이들과 농담을 하게 되고, 밥을 먹으면서 함께 웃을 일이 생겼다. 아이들과 나는 "똥"이라는 일상의 단어만으로도 자꾸 깔깔 웃었다.


결국 내게 "해야할 일"과 "하고싶은 일"은 한끗 차이였다. 다만 내 생각을 바꾸자, 자유와 기쁨이 느껴졌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이 지루한 일상이, 다시 너무 소중하고 감사한 일상이 되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부부싸움을 했다. 최근 2년여를 돌아봤을 때 가장 크게 싸운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사람과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이 책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 책에서 꼭 한 부분만 인용해야 한다면 나는 다음을 인용하겠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중요했다.



우리는 한 가지에만 집중한 사람들의 한계를 쉽게 본다. 책만 본 사람과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


우선 책만 본 사람의 한계는 타인에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쉽다. 왜냐하면 책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까닭에 현실의 폭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약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 발을 디디면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서 불평불만거리를 찾아내는 사람, 타인의 잘못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 선과 도덕과 정의를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


다음으로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에게 너무도 너그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옳고 그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타협과 조율을 통해서만 상황에 따라 문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선과 도덕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모든 것을 손익으로 판단하는 사람, 심연의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



나는 책만 본 사람, 남편은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의 모습을 정확히 하고 있었다. 남편은 신혼 초부터 부부싸움을 할 때면 나에게 "온실 속 화초"같다는 비난을 했고, 나는 줄곧 남편에게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했다.

나는 통금시간을 철저히 준수해야하는 엄격한, 하지만 1남1녀 중 장녀로 남녀차별없이 모든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비교적 넉넉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남편은 5남매 중 막내로 태생부터 적응을 해야하는 위치였고, 거기다 남편이 고3때 아버님이 보증을 잘못서서 대학 내내 학자금 대출을 받았고 이후는 그것을 갚으며 살아야했던 사람이다. (결혼 전엔 이런 남편의 과거가 멋져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남편은, 정의나 선보다는 실질적인 이익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게 참 안 멋져보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 경제적으로 걱정없이 살 수 있는 것이, 그의 그 이익을 중시하는 성향 때문이 아니겠는가. 남편과 심연의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내가 이 현실에서 이렇게 까불고 살 수 있는 것은 분명 그의 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정의롭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 기준이 터무니없었음도 인지하게 되었다.


 책만 읽는 사람인  부분으로 돌아와서, 나의 민낯을 들켜버린 것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대목이었다. 나는 온실 속의 화초였던 게 맞다. 책만 본 이상주의자도 맞다. 어디 가서 함부로 나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사장님은 나에게 정말 큰 깨달음을 주었다.


  



하지만 작가는 마지막까지 강조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세계는 내가 경험한 한계일 뿐이고,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 낸, 나의 관념 하의 세계일 뿐이라고. 그러니 그 어떤 세계이든.. 옳다는 결론에 나는 도달하기로 했다.


물론 내가 정말로 부족하지만, 눈치볼 필요도 없다.

이미 주어진 이 세계 역시 너무나 불완전한 세계이다. 마르크스가 말한 국가 역시 너무도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국가가 아닌가. 이미 이 세계도 엉망진창이다. 이 엉망진창인 세계를 그동안 의심없이 완전고결하다고 믿고 적응하려고 애썼는데, 알고보니 허점투성이에 의심하고 저항해야할 것 투성이인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아주 일부인 나 하나가 좀 오만하고 불완전했다고해서 뭐 그리 문제가 되겠는가. 그러니 그냥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살자싶은 결론에 도달했다.


나를 의심하기보다 세계를 의심하고, 나는 믿어주자는 결론.


다만 그동안처럼 노동자로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사유하고, 좀더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를 의심하지 말고, 세상을 의심하며 살고 싶다. 내가 아무리 불완전해도 세상만큼 불완전하진 않다. 어차피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그저 나의 세계일뿐인 것이다. 그러니 많이 부족한 나이지만 그래도 나를 긍정하며,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말 "남은 인생은 보너스"라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욕심내야 할 것들에 욕심내며 살고 싶다.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한번더!



(함께 읽고싶은 책 :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술라이커 저우아드)/ 그러라 그래(양희은) 그냥 제목만 보고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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