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재위632~647)
꿈꾸지 않으면 이루어 낼 것도 없다
우리 역사 상 여자가 왕이 된 경우는 신라시대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이렇게 세 명이 전부이다. 그녀들은 단지 성별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왕이 되는 과정이 험난했고, 왕이 되고서도 많은 남성들에게 갖은 조롱과 비난, 그리고 무력적인 위협까지 받아야 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그 최초라는 수식어가 주는 더 많은 고정관념들과 싸워야 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 백제라는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약소국이었다. 또한 중국에는 당이라는 막강한 나라도 있었는데, 가까스로 당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던 신라였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즉위에 대해 당 태종은 “신라가 여인네를 왕으로 모시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당 태종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일국의 왕을 향해 공공연한 조롱을 보낸 것인데, 사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훗날 비담 같은 신하는 “여주(女主)는 정사를 잘하지 못한다”는 지극히 남성우월주의적인 고정관념으로 난을 일으키기도 했고, 이웃나라 백제는 신라의 왕이 여자라고 우습게 여기며 강한 군사적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이후 고려시대에 지어진 김부식의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김부식은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라는 공적인 기록을 당당히 남겼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남성들과 남성위주의 역사관에 의해 갖은 비난과 조롱을 받아야 했던 선덕여왕. 하지만 그녀는 당시 신라의 어떤 남성들도 생각지 못한 원대한 비전을 품을 줄 아는 여인이었으며, 실제로 그 비전을 이루어낸 사람이었다.
발상의 전환으로 획득한 왕위
당시 신라에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다른 독특한 신분제도인 골품제라는 것이 있었다. 그 골품제에 따르면 신라의 왕위는 성골 귀족에게만 허락된 자리였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 대에 이르자, 그 성골귀족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 진평왕의 뒤를 이을 성골 남자가 한 명도 남지않았다. 당시 남아있는 성골의 핏줄은 진평왕의 딸들인 천명과 덕만, 그리고 진평의 사촌조카쯤 되는 승만이 유일했는데, 모두 여자였다. 하지만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은 전례도 없을뿐더러 감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으므로, 진평왕은 첫째 딸인 천명의 남편 용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천명 또한 감히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 생각했으므로, 비록 자신이 진평왕의 장녀지만 남편 용춘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이에 진평왕의 뒤를 잇는 왕위는 용춘에게 돌아가는 듯했다.
용춘은 진평왕의 숙부가 되는 진지왕의 아들이었는데, 진지왕이 폐위된 왕이기에 그 아들들 또한 성골로 인정받지 못했고, 성골 다음 신분인 진골이 되었다. 용춘은 아버지가 폐위된 왕이라는 크나큰 약점이 있었지만, 13세에 화랑의 풍월주가 될 만큼 출중한 능력을 갖추었으므로 진평왕 또한 그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가 왕이 된다면 진골 출신으로서 첫 번째 왕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진평왕의 둘째딸 덕만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언니 천명이 왕위에 오른다면 그것은 장녀로서 마땅한 일이므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언니가 왕위를 포기했다면, 다음 왕위계승권자는 자신인 것이다. 그녀는 용춘이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그에게 왕위를 양보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덕만은 화백회의에서 용춘과 자신 중 누가 더 왕에 적합한 인물인지 투표를 제안했다. 진평왕은 그런 배포를 가진 덕만이 왕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화백회의에서는 만장일치로 덕만을 왕으로 선정하였고, 그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왕이 탄생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남성 뿐 아니라 여성들조차 남자만이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하여 여자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참신한' 생각을 했다. 그런 발상의 전환 덕분으로, 언니 천명은 순순히 포기했던 왕위가 덕만, 즉 선덕여왕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여왕의 현실적인 외교 정책
여성으로서 왕이 되는 꿈을 꾼 선덕여왕은, 그 꿈의 결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하지만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여왕으로서의 길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남자 왕이라면 굳이 겪을 필요가 없었던 많은 어려움들에 맞닥들여야 했다.
그녀는 왕이 된 후에도 여자는 왕이 될 수 없다는 고정관념과 싸워야 했는데, 그 첫 번째 넘어야 할 큰 산이 바로 당나라였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두 강대국의 눈치를 봐야하는 약소국에 불과했다. 그런 신라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어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선덕여왕이 즉위하자 당나라의 태종은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서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 해마다 편안할 때가 없다.”라며 선덕여왕의 즉위를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무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가 종친 한 사람을 보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혼자서 갈 수는 없으므로 마땅히 군사를 보내어 보호하게 했다가 그대 나라가 안정된 다음에 그대들이 스스로 지키게 할 생각이다.”라고 말하며, 사실상 신라를 당나라의 속국으로 삼으려고까지 하였다.
그런 당 태종의 조롱을 들은 선덕여왕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일국의 왕인 그녀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다른 나라의 왕에게 무시를 받고 군사적 위협까지 당한다면, 당연히 분하고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나라와 등지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덕여왕은 당 태종에 대해 화내고 분노하기보다 그를 얼래고 달래는 전략을 썼다. 그녀는 당 태종에게 막대한 선물을 보내 구슬리며 앞으로도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후 선덕여왕의 정치를 겪은 훗날의 당 태종은 선덕여왕의 현명함을 칭송할 정도로 그녀를 인정하게 되었다.
여왕의 뛰어난 인재 등용
삼국시대의 국왕들은 조선시대의 왕들처럼 정치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라는 작은 공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모여 있던 당시는 그 삼국들 간의 잦은 전쟁이 있었고, 그러므로 왕들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직접 전쟁터를 누비며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일이었다. 그런데 여자인 선덕여왕은 직접 전쟁터에 나갈 수 없었다. 그것은 많은 남성들에게 비난받는, 여왕의 크나큰 약점이 되었다. 그녀는 그런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유능한 인재 발굴에 더욱 힘썼는데, 그 결과 여왕이 발굴한 인재가 김유신과 김춘추였다.
김유신은 가야계 진골 귀족이며 개인적인 능력이 출중하였는데, 가야계라는 이유로 정계에서 소외받았다. 김유신의 할아버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해왕이었는데, 금관가야가 망하자 신라에 투항하였다. 이에 구해왕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은 신라 왕족인 만명공주와 결혼하였고, 그 후손들은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이은이 일본의 왕족 마사코(한국 이름 이방자)와 결혼하여 일본계 왕족이 되었지만 일본에서 배척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유신 역시 신라의 주류에서 배척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유신은 열다섯살에 풍월주를 역임할 만큼 능력이 출중했고, 진평왕 때의 낭비성 전투에서는 혼자서 고구려 진지에 돌진해 공을 세울 만큼 호기 넘치는 인물이었다. 선덕여왕은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던 김유신을 주목하였고, 그를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다.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언니인 천명과 용춘 사이의 아들이다. 즉 김춘추의 어머니는 왕의 딸로 성골 귀족이었으나, 아버지인 용춘에게는 하자가 있었다. 앞서 말했듯 용춘의 아버지 진지왕은 폐위된 왕이다. 그러므로 김춘추 역시 폐위된 왕의 핏줄로 당시 사회에서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아버지 용춘은 선덕여왕과 왕위를 두고 경쟁하던 인물이 아니던가. 선덕여왕 입장에서는 언제든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조카 김춘추를 옆에 두기 껄끄러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능력이 출중했던 김춘추 역시 적극 등용하였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김춘추는 여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 예로 김춘추는 적국 고구려와 왜의 사신으로 가는 길을 자청했는데, 이는 사실상 목숨을 내놓은 일이었다. 김춘추는 자신을 믿고 등용해 준 선덕여왕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직접 전쟁터에 나가 진두지휘할 수 없다는 약점을 유능한 두 명의 장군 김유신과 김춘추를 파격적으로 발탁함으로써 극복하려했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알다시피 성공적이었다.
선덕여왕과 김유신, 김춘추 세 명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약간의 핸디캡을 가졌다는 것이다. 선덕여왕은 왕이지만 여자라는, 김유신은 진골 귀족이나 가야계라는, 김춘추는 어머니는 성골이나 아버지가 폐위된 왕의 아들이라는, 나름의 핸디캡이 존재했다. 그러한 나름의 약점들이 그들 사이를 더욱 강하게 엮어주었고, 또 무언가 위업을 달성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간절함을 심어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연결된 세 명, 선덕여왕, 김유신, 김춘추는 무언가를 이루어내겠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하였고, 훗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주역들이 될 수 있었다.
여왕의 치마폭 아래엔 더 큰 비전이 숨어 있었다
선덕여왕이 살고 있던 삼국시대의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사실상 약소국이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출발한 고구려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당나라와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강대국이었고, 백제 역시 농경이 매우 발달한 국가로서 신라와는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 선진국이었다. 당시 신라는 삼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겨우 생존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약소국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신라의 왕이었던 선덕여왕은 겨우 신라의 생존이나 걱정하며 전전긍긍하지 않았다.
여자로서 스스로 왕위에 오르겠다는 꿈을 실현한 그녀인만큼, 선덕여왕은 신라에 대해서도 큰 꿈을 꾸었다. 비록 지금은 삼국 중 제일 약소국이지만, 언젠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큰 꿈이다. 당시 신라의 상황에서 그 꿈은 여자가 왕이 되겠다는 꿈 이상으로 터무니없어 보이는 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신라의 그 꿈을 황룡사지 9층 목탑에 꼭꼭 담아두었다.
황룡사지 9층 목탑은 신라인이 아니라 백제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탑이다. 당시 신라로서는 그런 탑을 만들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탑의 건설을 위해 신라로 온 백제의 기술자는 탑의 기둥을 세우는 날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었다. 조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자 마음속에 의심이 든 그가 하던 일을 멈추었는데, 이에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였다. 할 수 없이 다시 일을 시작하자 천지가 평온을 되찾게 되고 결국 탑을 완성하게 되었다는 황룡사 9층 목탑의 연기 설화에서 알 수 있듯, 이 탑에는 선덕여왕의 삼국통일에 대한 염원이 숨겨져 있었다.
황룡사지 9층 목탑에서 1층은 왜,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을 의미하며, 그 석탑에는 지금 신라를 괴롭히는 그들 나라를 진압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 그 탑을 세운다고 실제로 그 모든 나라들을 제압할 수는 없었겠지만, 선덕여왕은 그 탑 속에 언젠가는 신라가 다른 나라들을 모두 제압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담았던 것이다. 그러한 포부를 가슴 깊이 숨겨둔 여왕은 실제로 삼국통일을 이루지는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녀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의 짧은 재위 이후, 선덕여왕이 적극 등용했던 인재 김춘추가 왕이 되자 그 꿈은 실제로 현실이 되었다. 삼국 중 가장 약소국으로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걱정해야 했던 신라가 선덕여왕 이후 불과 17년 만에 삼국을 통일하는 기염을 토해냈던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선덕여왕의 즉위를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런 남성들의 비난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선덕여왕이 재위한 뒤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고, 훗날 삼국통일의 근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그간 신라의 남성들이 감히 생각해내지도, 해내지도 못한 일을 달성해낸 왕이었다.
비록 삼국통일에서 당나라의 힘을 빌렸고, 그로 인해 한강 이북의 땅을 잃는 손실을 겪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 자체에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하지만 당시 최약소국 신라의 왕으로서 선덕여왕이 품은 그 원대한 비전에 대해서는 인정해주어야 한다. 선덕여왕은 다른 신라의 남성들이 신라의 생존만을 걱정하고 있을 때, 생존을 넘어 삼국 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선덕여왕이라는 훌륭한 리더의 꿈 덕분에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배울 것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으로, 삼국통일이라는 위업의 기초를 마련한 선덕여왕. 그녀의 삶이 역사에 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꿈'을 품었기 때문이다. 여자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꿈, 당시 최약소국인 신라였지만 삼국을 통일할 수 있다는 꿈. 감히 그런 꿈을 품었기에 그 꿈을 이루어낼 기회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의 꿈이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았던 것도, 누구에게나 지지와 응원을 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비웃음과 조롱을 받아야 했던 꿈들이었다.
하지만 그 꿈이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녀는 자신의 꿈을 소홀히 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많은 고난들을 모두 이겨내고, 마침내는 그 꿈들을 이루어냈다.
우리에게도 그녀와 같은 정신이 필요하다. 우리의 꿈이 비록 타인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받는다고 해도, 위축되어 포기할 것이 아니다. 그런 때일수록 오히려 더 큰 힘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인 것이다.
김구 선생님 역시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신 분이다. 김구 선생님은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강대국이 될 것을 꿈꾸었다. 그는 그 글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를 이끄는 민족이 될 것을 믿습니다.”
김구 선생님이 그 글을 쓴 해는 1948년이다. 1948년, 그때는 우리나라가 겨우 식민지에서 벗어난지 3년이 채 되지 않던 때이다. 그것도 완전한 해방이 아닌 남북이 분할되어 미국과 소련에 의해 다시 통치를 받던 시대였다. 고아가 넘쳐났고, 기아는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런 시기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정치판은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져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해방 후 “혼란한 시기”였다.
만약 1948년에 내가 김구선생님의 이 말을 들었다면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을 것 같다. 이만큼 가난한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세계 강대국이 될 것이고, 또 문화적으로 세계를 이끄는 민족이 된다니. 존경하는 김구선생님이지만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의 꿈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구선생님이 <나의 소원>이라는 글을 쓰신 후 불과 40년이 지난 우리나라는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 대국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전쟁 고아들을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월드비전을 통해 이제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도와주고 있고, 많은 제3세계국가들은 한국을 모델로 하여 자국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그리고 또 불과 몇십 년이 흐른 2010년대, 우리나라의 문화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 한류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한때는 우리가 선망해 마지않던 그들이 이제는 한국 노래를 따라 부르고 한국 가수의 춤에 열광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1948년 당시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성공적인 발전을 이룬 데에는 물론 우리 국민의 성실과 근면이 많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대국이 될 것이라는 김구 선생님 같은 분의 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김구 선생님의 생각이, 선덕여왕의 생각이 부질없는 것이라 비웃는 대신, 이제껏 인생에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원대한 꿈을 꾸어보자. 꿈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차후의 문제이다. 꿈을 이룰지 못 이룰지의 가능성은 50%이다. 하지만 꿈이 없다면 그것을 이룰 가능성은 제로이다. 그러므로 꿈을 꾸자. 누구도 생각지 못한 크고 원대한 꿈을!
<참고> 여성 왕의 비애
신라의 멸망에 대한 원인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진성여왕의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남성위주의 역사관에 의해 왜곡된 면이 있다.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를 때 이미 신라는 망조의 길에 들어섰다. 그런 위기의 신라에서 진성여왕의 즉위에는 남다른 의미가 담겨있었다. 이전 신라의 위기 시절, 선덕, 진덕여왕으로 인해 그 위기를 극복한 전례가 있듯, 이번 위기의 순간에도 여왕이 즉위하여 다시 한 번 위기의 신라를 구해주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신라였으므로 진성여왕 혼자서 그 신라를 구해낼 수는 없었다. 진성여왕은 골품제의 한계를 즉시하고 6두품의 최치원과 같은 학자를 적극 발굴, 등용했다. 하지만 진골 귀족들을 그런 여왕의 정치에 반발하였고 결국 최치원은 은둔해버리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진성여왕 혼자 고군분투한다고 신라가 구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신라의 멸망을 진성여왕에게서 찾는다. 하지만 제51대 진성여왕 이후 56대 경순왕까지 다섯 명의 남성 왕들을 거친 후 신라는 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사람들은 신라를 멸망시킨 신라의 마지막 왕이 진성여왕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까지 있다. 이 역시 남성 위주의 역사관에서 철저히 왜곡된 여성 왕의 비애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