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우리나라와 중국은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서 중국과의 관계는 언제나 중요한 외교 문제였다. 심지어 조선 사회에서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문화가 당연시 될 정도로 중국이 조선에 미치는 영향력은 컸다. 중국과의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는 고려시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고려 말 우리나라는 유례없이 타 국가에 100년이라는 긴 시간 내정 간섭을 받게 되는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니게 되는데, 당시 그 고려를 지배했던 나라는 칭키스칸이 세운 세계 제국 원나라였다.
이번 글의 주인공인 고려 여인 기황후는 바로 이 원나라의 마지막 황후이다. 고려 출신 여성이 중국 황제의 총애를 받은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중국 황실에서 정식 황후가 된 경우는 기황후가 유일하다. 만약 원나라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기황후의 아들이 황제 자리를 이어받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아우르는 대제국 원나라의 황제는 고려인의 핏줄을 가진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정통성을 끔찍이도 중시하는 원 황실에서 어떻게 이민족 출신 고려 여인이 황후가 되고, 그녀의 아들이 황태자가 될 수 있었을까? 지배를 받는 약소국에 불과했던 고려 여인이 원나라의 황후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녀의 인생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을까?
눈물의 길을 기회의 길로
기황후가 살았던 1330년대의 고려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다. 30여 년간 원나라의 수차례 침략에도 고려는 꿋꿋이 막아내었다. 하지만 몽고에서 일어나 동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며 맹렬함을 떨치던 원나라의 위력 앞에, 고려도 더는 항거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 고려는 이후 원나라의 끝도 없는 요구들에 부응해야 했다. 원나라는 많은 물자뿐 아니라 고려의 왕실과 귀족의 자제들을 인질로 요구했고, 그들이 글에 융통하지 못한 탓에 총명한 고려 남자를 환관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유목민족으로 여성이 턱없이 부족했던 원나라에서 많은 고려 여성을 공녀로 요구한 것이다. 80년간 수없이 많은 고려 여인들이 공녀가 되어 원에 끌려가야 했다.
당시 공녀가 되는 길은 눈물의 길이었다. 운이 좋으면 황실이나 귀족의 첩이 될 수 있었지만, 대부분 기생으로 팔려가 평생을 비참하게 살아야했다. 뿐만 아니라 공녀의 길은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그 길은 부모형제와 고향산천을 떠나 이민족 남성들의 품을 전전해야 하는 치욕과 수난의 길이었다.
당시 공녀는 원나라 황실이나 귀족 남성의 첩이 되기도 했으므로, 원나라는 고려의 양인들뿐만 아니라 귀족의 딸들도 공녀로 요구하였다. 전 추밀원부사를 지낸 홍문계는 딸이 공녀의 명단에 끼자, 딸을 빼내기 위해 뇌물을 썼다. 그래도 되지 않자 딸의 머리를 깎아 출가를 시키려 했는데, 이것이 적발되어 홍문계는 혹형을 당하고 가산을 몰수당했다. 그의 딸에게는 쇠채찍으로 두들기는 형벌이 내려졌고 결국은 공녀로 데려가버렸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공녀의 길을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지만, 원나라의 과도한 요구에 대해 고려 조정은 별다른 방법을 취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녀의 길이 확정되면 처녀들이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며 생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기황후 역시 이런 치욕과 수난의 공녀로 뽑혀 원나라에 가게 된다. 그녀의 고조부 기윤숙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고 그녀의 아버지인 기자오도 총부산랑을 역임하였으므로, 그녀 집안도 평범한 집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공녀의 길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기씨 소녀가 공녀로 뽑혀 원나라로 끌려가는 배안에는 그녀와 같은 처지의 소녀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당시 13~16세의 어린 소녀들이 공녀로 바쳐졌는데, 어린 나이에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땅으로 향하는 배를 탔을 때, 그 소녀들은 얼마나 무서운 생각이 들었을까. 어떤 처녀들은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어린 기씨 처녀 역시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가 암담하고 슬프게 느껴질 뿐이었다. 같은 처지의 다른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눈물로 그 길을 떠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눈물의 길을 수동적으로만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왕 닥친 상황이라면 이 상황을 기회로 삼겠다고, 이 눈물의 길을 기회의 길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고려 공녀에서 원의 황후가 되기까지
기씨 처녀가 원나라에 당도했을 때, 고려 출신의 원나라 환관 고용보는 몇 명의 처녀들을 따로 뽑아 가려고 그곳에 왔다. 고용보 역시 자신의 의지에 의해 원나라에 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왕 원나라에 온 이상 어떻게든 이곳에서 권력을 잡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환관이라 하더라도, 환관 혼자서는 그 권력이란 것을 잡기 어려웠다. 환관 고용보는 황제를 사로잡을 고려 여인을 물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기씨 처녀가 눈에 들어왔다. 기씨 처녀는 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귀족 출신으로 학식과 품위까지 갖춘 여인이었다. 기씨 처녀는 여효경과 각종 사서를 읽을만큼 학식과 품위가 있었다.
기씨 처녀는 고용보에 의해 황제의 눈에 띄기 쉬운 다과 담당 궁녀가 된다. 고용보의 생각대로, 아름다우면서 자연스러운 기품이 흘렀던 기씨 처녀는 금방 원 황제인 순제의 눈에 띄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기씨 처녀는 순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서 일이 금방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씨 처녀에게는 시련이 닥칠 뿐이었다. 당시 황제에게는 두 명의 황후가 있었는데, 제1황후였던 타나리시는 기씨 처녀를 질투하여 매우 매질을 하기도 했고, 인두로 살을 지지기까지 했다. 기씨 처녀는 여러 수난들을 당하면서 원 황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녀도 무언가를 준비해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당시 제1황후였던 타나리시의 집안은 황제 이상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황후 타나리시의 아버지 앤티무르는 과거 순제의 아버지인 명종을 폐위시키고, 그 동생인 문종을 황제를 만들었다. 황제를 갈아치울 정도의 권세를 가진 집안이었으므로, 고려 공녀 출신의 기씨 처녀는 감히 타나리시와 대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당할 수만도 없었다. 그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목숨마저 위태로울 것이었다. 고려 공녀 출신인 그녀가 황후와 직접적으로 맞설 수는 없지만, 황제 뒤에서 그를 조정할 수는 있었다. 순제 역시 타나리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순제에게 타나리시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순제의 마음을 이용한 기씨 처녀는 더욱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고, 마침내 순제는 그녀를 제3황후로 책봉하려고까지 했다. 그것은 기씨 처녀가 원 황실에 들어온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지만 원나라는 정통성을 매우 중시하는 민족으로, 대대로 황후의 집안은 정해져 있던 터였다. 고려 공녀라는 하찮은 배경을 가진 이민족 여성을 황후로 책봉하겠다는 순제의 생각에는 당연히 대대적인 반대가 뒤따랐다. 특히 제1황후였던 타나리시 집안에서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타나리시 집안은 다시 한 번 황제를 갈아치울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이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타나리시 집안은 역모죄로 일망탕진되었다. 이때 제1황후 타나리시 역시 사약을 받아 죽는다.
이로써 기씨 처녀를 방해하던 큰 장애물 하나가 사라지게 되었이다. 이제 황실에서 그녀를 대적할 상대는 없었고, 순제는 다시 한 번 그녀를 황후로 책봉하겠노라 선포했다. 이제 그녀도 황후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원나라 황후 자리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몽고족의 전통을 중시하던 승상 빠엔이 몽고족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며, 그녀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였다. 빠엔 역시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자였으므로, 기씨 소녀는 다시 한 번 황후에 책봉될 기회를 놓치고 만다.
하지만 거대한 산이었던 제1황후를 탕진한 경험이 있는 기씨 소녀였다. 그녀는 자신감이 생겼다. 더군다나 얼마 전 순제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아 입지가 더욱 공고해진 상태였다.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된다면 빠엔 역시 축출하기로 결심한다. 암암리에 샤라빤이라는 재상과 손잡은 기씨 소녀는 결국 빠엔까지 실각시키고 만다. 빠엔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이 있던 샤라빤은 순제에게 기씨 소녀를 황후로 책봉할 것을 제안한다. 이전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던 순제는 흔쾌히 그녀를 황후에 책봉하게 되니, 드디어 고려 공녀 출신의 기씨 처녀가 제2황후가 되었다. 제1황후가 따로 있었지만 이미 조정은 그녀의 치마폭 아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거의 30여년간 그녀는 무능력한 순제를 대신하여 원나라 황실을 주무르게 된다.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다
사실상 원나라 황실을 지배하는 세력은 순제가 아니라 기황후였다. 그녀는 황후직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편하고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로 임명하며 황실의 재정을 장악하였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세력들로 가득 찼고, 그들은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막대한 권력을 가진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었고,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로 임명해 군사권 역시 장악하였다.
그녀 이후 원나라에서는 고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야 진정한 고관대작이라는 인식까지 생겨났다. 또한 당시 원나라 문화가 고려를 지배하는 풍조가 뒤바뀌어, 고려 문화가 원나라에서 유행하게 되었다.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한다.
공녀로 끌려와 천대 받던 고려 여인의 처지는 기황후로 인해 역전되었고, 고려의 문화는 원나라의 문화보다 더 세련된 것으로 추종 받게 되었다. 그렇게 기황후는 원나라에 고려 문화를 유행시킨 장본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무능한 순제를 대신하여 정치에 힘썼고,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도 소홀하지 않았다. 당시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는 많은 금은과 곡식 등을 내어주며 대규모 구호사업을 펼쳤다.
그녀는 조국인 고려를 위한 일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황후로 있으면서 충렬왕 때부터 시작되어 80여 년간 지속된 공녀 징발이 금지되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 황제가 고려왕을 갈아 치울 만큼 원으로부터 심한 내정 간섭을 받고 있었다. 여러 차례 고려를 아예 원의 하나의 성으로 만들자는 논란이 더욱 심해지던 터였다. 그런데 이러한 논란을 일축하고,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해주기로 것도 기황후가 황후로 있을 때였다.
그녀는 대제국 원의 황후로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고, 그 권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능한 남편 순제를 대신하여 정치에 힘썼고, 백성들을 구휼했다. 또한 조국인 고려가 수십 년간 전전긍긍하며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해 주기도 했다.
그녀는 정말 악녀였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황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그녀를 원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도 그녀하면 고려 말 악랄한 세도가였던 그녀의 오빠 기철이 먼저 떠오르며, 그녀 역시 악녀로 기억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는 왜곡된 면이 크다.
먼저 원나라의 멸망을 기황후의 책임으로 돌리는데, 이는 당시 황제였던 순제가 무능했던 탓이다. 이미 주원장을 위시한 한족들의 봉기가 수차례 이어지던 상황이었지만, 순제는 그런 상황을 지켜볼 뿐 막아내지 못했다. 기황후는 위기에 빠진 원나라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순제를 대신할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현되기 힘들었고, 그녀가 바랐던 원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주원장에 의해 대도 연경을 빼앗기고, 순제와 기황후, 그의 아들은 모두 몽골초원으로 쫓겨나며 원나라는 망했다. 원나라의 멸망에 대해 중국인들은 그 원인을 이민족 고려 여인 기황후에게 돌려버림으로써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중국의 인식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전해지게 되었고, 사대주의가 팽배했던 조선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원나라의 멸망이 기황후 때문인 것으로 공고화되어 버렸다.
또한 그녀가 우리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녀의 오빠 기철 때문이다. 사실상 황후의 권력을 믿은 기철과 그의 가족들은 심하게 기고만장했다. 기철은 자신의 힘을 고려를 위해 쓰기보다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했다. 기황후 역시 그런 오빠와 가족들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들어준 잘못이 있다. 그녀 역시 황후라는 자리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부분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권력가들의 권력 남용과 횡포는 사실상 대부분의 권력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이 분명 잘못된 일이기는하지만, 우리 역사의 많은 이들이 그랬다. 그런데 왜 유독 그녀에게만, 그런 부정적인 부분들이 더욱 엄격하고 가혹하게 평가된 것일까. 그녀가 했던 좋은 일들은 대부분 축소되거나 부정되고, 그녀의 악행만이 부각되어 역사에 전해지고 비난받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당시 남성중심의 역사관에 의한 것이리라. 여성의 정치 참여를 반대했던 조선의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고려 왕실의 권력을 넘어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한 여성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역사 기록의 중심이었던 남성들은, 여인으로서 남성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그녀의 업적에 대해서는 축소해버리고, 그녀의 오빠들을 중심으로 한 악행들 위주로 기록에 남겼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상 이민족의 침입을 100년 동안이나 받은 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그 잊고 싶은 시기에 권세를 떨치던 기황후에 대해서도 역사의 기록자들은 어쩌면 무시해버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는 우리 역사상 여성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여성이라는 것, 그리고 당시 고려의 남성들도 하지 못한 일을 그녀가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만이 아니라 이민족 여인으로서 30년간 황제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고려 남성들이 몇십년간 노력해도 이뤄내지 못한 일들도 단번에 해냈다. 고려 출신 공녀로 원나라에 도착하여 막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황후가 될 때까지, 그녀가 발휘한 끈기와 인내, 그리고 인생에 대한 적극성과 진취성에 대해서만큼은, 이제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녀에게 배울 점
고려 말 당시 공녀의 길은 그야말로 눈물의 길이었다. 하지만 기황후는 그 눈물의 길을 새로운 기회의 길로 만들었다.
인생에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 닥쳤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 것인가”이다. 그녀는 자신 앞에 닥친 최악의 상황을 유일무이한 역사적 인물이 되는 기회로 삼았다.
그녀가 황후가 되는 길이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제1황후였던 타나시리가 주는 수많은 수모들을 참아내야 했고, 몽고족만이 황후가 될 수 있다는 그들만의 전통과도 싸워내야 했다. 승상 빠엔과 같은 거대한 장애물들과도 수없이 맞서 이겨내야 했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고려 공녀 출신의 이민족인 그녀가 제1황후가 되기까지, 그녀는 수없이 인내하고 또 인내했고, 언제나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였다.
황후가 된 이후에도 그녀는 원나라의 주류 문화에 동화되려고 노력하기보다 원나라에 고려의 문화를 유행시킴으로써, 원 황실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녀는 유행에 따라가기보다 유행을 창조할 줄 아는 진취적인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80년간 이어져오던 고려의 공녀 징발을 금지시켰으며, 고려가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순제를 조정하였다. 자신을 공녀라는 비극적 삶으로 내몰았던 조국이지만, 그녀는 고국을 위해서도 힘썼던 것이다. 그녀는 당시 고려의 남성들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낸 여인이었다.
자신의 비극적인 상황을 기회의 상황으로 역전시키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힘겨운 시간들을 견뎌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적극성과 진취성으로 일구어낸 여인. 그녀는 최고의 권력을 누릴 자격이 충분한 여인이었다.
우리 인생에서 위기나 불행이라는 것이 아예 닥치지 않으면 좋겠지만, 한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그것을 겪지 않을 수는 없다. 또한 어떤 상황이라는 것이 늘 원하는대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상황을 관리하는 것보다 태도를 관리하는 것이다. 위기 상황이 닥쳤다면, 그 위기를 어떻게 활용하여 기회로 삼을지 고민해야 한다.
지금 주어진 상황이 비극적이라고 불만하는 대신, 그 상황을 어떻게 역전시킬지를 고민해보자. 우리 역시 기황후처럼 우리 앞에 펼쳐진 눈물의 길을 최고의 기회의 길로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