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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시 Jan 24. 2021

슬픔을 굴리는 시시포스들의 세계

1. 타인의 슬픔은 이해할 수 있을까

by Usi


몇년 전 이제 막 사회부에 갔을 때 '뭐라도 건질 수 있을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다 한 시민단체찾아간 적이 있는데, 주로 고리대금업이나 불법사채 같은 피해를 입은 이들을 돕는 일을 하는 단체였다. 말이 단체지 얼핏 봐도 6평 정도 되려나 좁은 사무실에서 사무처장 한 분이 거의 모든 일을 맡아 하는 곳이었다. 강단 있고, 고집 세고, 훌륭한 분으로 기억한다.


무작정 찾아간 곳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어려웠다. 정희진은 어느 칼럼에서 '쉬운 글'을 ①내용도 좋고 문장도 쉽게 잘 쓰인 글(거의 없음) ②익숙한 논리와 상투적 표현으로 쓰여져 아무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글로 구분한 적이 있다. 내 경우엔 이곳의 이야기가 두 가지 이유로 어려웠는데 ①경제 용어가 많아 어려웠고 ②내 상식과 동떨어진 세계의 일들이라 어려웠다. 이야기를 시작했을 땐 첫 번째 이유가 곤란했는데, 끝마칠 즈음에는 두 번째 이유가 아프고 무거웠다.


이곳에 방문하는 피해자들 중에서는 1~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즉 신용도가 그리 나쁘지 않으면서도 사채를 써서 빚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이해가 안 가 "아니 1, 2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는데 왜 굳이 사채를 써요?"라고 물었다. 사무처장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라고 했다.


나는 다시 "아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데. 일반적으로 돈 없으면 일단 은행 가지 않나요?"라고 하자

그는 "기자님 상식이 뭔데요?"라고 되물었다. 이미 이전 대화에서 "기자님 상식대로 세상을 보지 말라"고 수차례 말해왔던 사무처장의 목소리에는 신경질과 답답함이 담겨있었다.


그는 "기자님 돈 궁해봤어요? 4년제 대학 나와서 지금 기자하고 있죠? 여기 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못 배우고 어렵게 자랐어요. 기자님이 말하는 그 상식으로 이걸 보면 안 돼요"라고 말했다.


대충 이런 얘기였다.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큰 돈이 필요하면 자신의 신용도가 그리 나쁘지 않아도 일단 자신은 해당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는데, 네이버 지식인 같은 곳에 이런 사람들을 노리고 들어온 고리대금업, 불법사채업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네이버에 '돈 빌리는 곳'을 쳐보면 여러 문의와 댓글들을 볼 수 있다.


상식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개념인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것 역시 계층에 따라 나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아비투스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아비투스'라는 단어를 이해하고 하지 못하고 역시 아비투스일지도 모른다.




이런 적도 있었다. 시청각장애인 이주인(가명)씨를 인터뷰한 날이었다. 지난 2년간 주인씨를 보조해온 활동지원가의 도움을 받았다. 주인씨는 시력을 잃었고, 보청기를 낀 오른쪽 귀에 바짝 대고 큰 소리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야 어느 정도 들렸다.


5월의 어느 금요일 정오가 조금 지났다. 인터뷰를 끝내고 국립중앙박물관 앞 공원 벤치 위로 자란 나무를 벗어나니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었다. 하늘은 맑게 푸르렀다. 27도 정도 초여름 날씨였다. 평일 낮 넓은 공원은 한적했고 바람도 귓가를 살랑살랑 지나갔다.


활동지원가의 한쪽 팔을 붙들고 걷던 주인씨가 “시원하고 조용하니 좋네” 하고 말했다. 지원가는 주인씨의 오른쪽 귀에 대고 “아유 조용하니 좋아요?” 물었다. 주인씨는 웃으며 “그럼 좋지. 청각장애인이라고 뭐 시끄러운 것도 좋은 줄 아나?” 하고 말했다.


그들과 일고여덟 걸음 떨어져 걷던 나는 ‘아…’ 하고 내심 당황했다. 들리지 않는 이들은 어떤 소리든 들리기만 하면 좋아하리라 생각 건 아니지만, 뭐랄까… 내 무의식이 그런 예단을 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도 없었다. 누구에게나 듣기 싫은 소리가 있는 것인데도. 나는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걷는 척했다.


이런 기억들을 떠올릴 때면, 타인을 이해하는 데 나는 얼마나 다다를 수 있을지 생각하곤 한다. 무엇보다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나는 이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가.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가' '내가 선 위치에서 바라본 타인의 세계를 온전히 옮겨적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가능하지 않다면 온당한 일인가'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 (중략) ...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이것은 거부할 수도 박살낼 수도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中)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당연한 특성 기질이라면 그냥 편하게 이해하지 않고 살면 될 터인데, 인간은 또 인간인지라 그러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각자의 바위를 산정상까지 밀어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산 정상까지 죽을듯 말듯 바위를 굴려 정상에 올랐다가, 찰나의 기쁨을 만끽하고 굴러떨어진 거대한 바위를 다시 산 정산으로 올리는 일. 힘들면 하지 않으면 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 그렇게 타인을 끊임없이 이해하려 노력하고, 또 실패하고를 반복하는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말


인용한 정희진 선생님의 글은 '쉬운 글이 불편한 이유'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302142125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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