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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티 Sep 29. 2024

섬나라 토끼

 섬나라 토끼들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랑거리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았고, 걱정거리를 서로 나누는 일도 없었다. 눈앞에서는 친절하게 웃어도, 얼굴을 돌리자마자 그들무표정한 얼굴로 변했다. 그들의 웃는 얼굴이 믿을 수 없어졌고,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호랑이 굴에서는 그랬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의 마음속에는 ‘가족은 일심동체’라는 생각이 있었고, 호랑이끼리는 끈적한 무언가가 통하고 있었다. 가끔은 피보다 진하다는 그 생각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하고, 때로는 몸싸움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섬나라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다투는 일도 그렇다고 격하게 포옹하는 일도 없었다.      

 

 처음에는 섬나라의 이런 것들이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에게조차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새끼의 삶에조차 개입하려 하지 않는 섬나라 생활은 진공관 속에 있는 것처럼 답답해서 나는 질식할 것 같았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일같이 뜬눈으로 밤을 새우자니 건강이 나빠졌다. 굴 안 일은 물론이고, 그나마 해왔던 공동체의 작은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다. 옹달샘에 물을 마시러 온 친절한 암컷 토끼에게 이야기했다. 그녀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방토끼 씨. 다들 그렇게 살아. 수컷 토끼는 바쁘고, 새끼들은 커가는 거잖아. 유별나게 굴지 마. 잠이 오지 않으면, 이파리 끝이 뾰족하고 털이 복슬복슬한 풀을 뜯어 먹어 봐. 잠을 잘 수 있을 거야.”

 친절한 말투로 말해 주었지만, 나는 이상하게 화가 끓어 올랐다.

 ‘유별나다고! 섬나라 토끼 말을 하느라, 섬나라 풍습을 익히느라 내가 얼마나 애를 쓰는지 너희가 알고 있어? 그렇게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거야?’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한 번도 섬을 벗어나 보지 않은 그들이, 내 사정을 모르는 그들이 할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그들과 잘 지내지 못하면 섬나라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들의 눈 밖에 날 만한 말이나 행동은 삼갔다.          

 

 입에서 피비린내가 날까 봐 날고기는 먹으려 하지 않았고, 다른 토끼들이 놀랄까 봐 호랑이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상처에 좋은 풀을 가르쳐 주어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산에서 내가 알던 것들은 이곳에서는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점점 이곳이 싫어졌다. 수컷 토끼는 말할 것도 없었고, 내가 낳은 새끼조차……. 숨 막히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다 버리고 떠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라고는 호랑이 굴밖에 없었고, 애써 도망쳐 나온 그곳으로 돌아가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혼자서 큰잠자리 배에 올라탈 자신이 없어서 절망감에 사로잡혀 지냈다.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나를 본 의사 토끼가 말해 주었다.

 “그렇게 먹지 못하면 곧 죽게 될 거야. 저기 호수 건너에는 다른 토끼들이 가지 않는 조용한 풀밭이 있어. 호숫가에서 한동안 쉬어보도록 해. 수컷 토끼에게 자세한 장소를 알려줄 테니 내일 같이 와.”

 “수컷 토끼는 바빠요.”

 “바쁘고 말고가 어디 있어. 지금 네가 다 죽어가는데. 반드시 같이 와.”


 조용한 휴양지라던 호숫가에는 본 적이 없는 행동을 하는 토끼들로 북적거렸다. 네 발로 엉금엉금 기기만 하는 토끼, 뒷걸음질하는 토끼, 쉬지 않고 앞발을 떠는 토끼, 계속해서 뾰뾰뾰뾰라고 중얼거리는 토끼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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