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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Nov 12. 2024

영문 모를 택배

#홍합짬뽕

계획에 없던 이른 퇴근에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하다.

'저녁준비하기 전까지 이불에서 뒹굴어야지~!'

퇴근하자마자 가족들 해먹일 저녁을 하려면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힘들었는데 단 2시간의 여유가 이렇게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혼자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 앞에 도착했더니 영문 모를 커다란 아이스박스가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얘들아, 좀 나와봐. 택배와 있는데 이거 가지고 들어가자."

아이들이 나오길 기다리며 박스를 밀어보는데 끄응, 어찌 움직일 생각이 없다. 대답은 큰 소리로 '예'하고는 엉덩이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아들 둘이 겨우 나오더니 현관문 앞에서 용쓰고 있는 엄마를 보며 말한다.

"엄마, 내가 그거 들어봤는데 꿈쩍도 안 해."

"진짜? 도대체 이게 뭐야?"

왠지 예정되었던 달콤한 쉼에 차질이 생기는 거 같아 미간이 찌푸려진다.


"따르릉"

때마침 폰이 울려보니 최근 우리 집 셰프로 등극 남편이다.

"어디야? 집이야? 그럼 그 택배 받았지? 나 지금 집에 가고 있으니까 그냥 놔두면 돼. 끊어."

아니, 이 남자가 무슨 랩을 하는 건지 빠른 비트로 자기 할 말만 쏟아내고는 바쁜 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에라이 모르겠다. 나도 그냥 들어가 쉴래.'


집안복으로 탈의 후 침대로 뛰어들자 세상 편하다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엎드려서 팔다리를 사방으로 뻗어 누운 채 손을 아래로 움직이니 보드라운 이불 감촉이 곤두섰던 신경을 쑤욱 내려준다. 엄마살결에 부비는 기억의 회상인지 여하튼 묘하게 얻어진 아늑함을 즐기는 순간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다 뭐야?"

나는 도대체 뭘 시킨 건지 궁금하면서도 이불 속 포근함에 빠져나오질 못하고 안방에서 큰소리로 물었다.

"이거 홍합이야. 얼만지 알아? 2만 원. 말이 되냐고. 2만 원에 10킬로라니."

남편은 뽑기에서 득템을 한 사람처럼 신이 나서 안방문 앞까지와 자랑을 한다.

'10킬로?'

침대 위에서 고개만 든 채 감히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측정을 해보는데, 아하..

엊그제 그가 마트에서 사 온 홍합을 뜯었더니 향이 신선하지 않다며 화를 내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에 꽂히면 끝을 보는 그의 성격에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그때 스텐 개수대 위로 우르르 쏟아져내리는 홍합의 엄청난 소리가 거실에서 무섭게 들려왔다.

"어서 나와봐. 양이 장난 아니야. 오늘 홍합파티해야겠는데~"

들뜬 그의 목소리에 반한 내 마음의 소리...

'아.. 오늘도 쉴 순 없는 건가.'

"응, 쉴 순 없어. 넌 나의 영원한 보조니까."

라고 신랑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다.


사실 남편이 처음 요리에 빠져서 여러시도를 할 때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옆에서 거들었다. 맛있는 요리를 해준다는데 싫다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아직 요리가 서툰 남편옆에서 챙겨주고 같이 치우다 보면 혼자 요리할 때보다 손이 더 많이 가는 단점이 있었지만, 가끔 특별한 날에 솜씨를 뽐내며 멋진 저녁을 준비하는 남편을 떠올리면 감탄이 절로 나오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드라마틱한 날이 곧 펼쳐지길 손꼽아 기다리며 초보요리사 남편곁에서 묵묵히 보조를 수행한 지 4년이다.


차츰 칼 써는 것이 익숙해지고 다양한 레시피를 섭렵하면서부터 그는 초보딱지를 뗐다는 사실을 알리듯 요리로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길 시작했다. 당최 갈수록 요리에 대한 집념은 마르질 않았고 어떤 요리든 시작하면 본인심사를 통과할 때까지 파고 또 파고들었다. 비상금을 어디 숨겨놓고 쓰는 건지 요리에 대한 열정만큼 요리를 위한 투자비가 뜨거웠는데 그 비용측정은 우리 집 일인 남자 셰프 본인 지휘하에 독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니 요리해 준다는 남편 옆의 내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개수대를 가득 메운 홍합은 정말 틈새도 없이 비집고 들어차있다.

"이걸 어떻게 다 손질해. 그리고 해산물은 금방 요리해 먹어야지 안 그럼 다 상할 텐데.."

솔직히 손이 커도 너무 크다. 4인가족 식사에 10킬로나 되는 양을 저지른 신랑에게 볼멘소리를 시작으로 뒷목 잡고 쓰러지려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둘째가 내 말을 가로막는다.

"우와~ 아빠 진짜 짬뽕해 줄 거야? 나 정말 정말 먹고 싶었는데!"

알고 보니 초등학생 입맛 둘째가 아빠에게 짬뽕을 끓여달라며 며칠 동안 노래를 불렀다는 것. 일반짬뽕도 매워서 못 먹는 아이라 순한 짬뽕 맛보길 간절히 원했고 아빠는 한가득 끓여 먹어야겠다며 기쁜 마음으로 이 대참사를 이뤄냈다는 서사인 것이다.

그래.. 참 아름답구나.

남편 포함 아들 셋을 키우는 것이나 다름없는 나는 이제 단념이 빠르다.


10킬로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어서 손질을 해야 저녁을 먹을 수 있기에 본격적으로 홍합손질에 돌입했다. 정신없이 홍합에 붙은 이물질을 잡아당기고 떼고 있는데 같이 돕던 신랑이 사라졌다.

"쨔잔~내가 오늘을 위해 특별히 이걸 준비했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세상에, 남편이 중국집에서나 쓰는 커다란 웍을 들고 자랑스럽게 서 있다.

"그건 가정용이 아니야. 식당에서나 쓰는 거지. 어쩌려고 그렇게 큰걸 샀어? 놔둘 때도 없겠다."

"기다려봐. 내가 진짜 맛있게 해 줄 테니까."


남편이 기름 둘러 가늘게 채 친 돼지고기를 볶으며 불쇼 보여주고 야채투하, 칼집 넣은 오징어와 홍합, 목이버섯 투하하고 짬뽕을 후딱 끓여낸다. 4년 차가 되더니 확실히 손이 빨라졌다.


내 sns에 올렸던 사진



"와~ 맛있는 냄새."

역시 그 남자의 아들 아니랄까 봐 코는 개코다. 맛있는 냄새에 반응하는 아들들은 알아서 식탁에 자진착석해 주시고 아빠가 담아준 홍합짬뽕을 국물부터 맛보는데 첫째의 눈이 동그래진다.

"와~아빠 국물 장난 아닌데."

남편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피었다.

맛이라도 없으면 마음 놓고 짜증을 내겠는데 맛이... 있다.

숟가락으로 한 입 국물을 먹었더니 홍합에서 나온 바다향과 고기의 불향이 입 안에 터진다. 야채도 듬뿍 넣어 아이들도 맵지 않게 먹을 수 있는 순하지만 담백하고 깊은 국물맛이다.

"여보~진짜 국물맛이 다르다. 맛있어."

칼질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맵지 않게 해 달라는 주문에 맛이 비는 곳 없이 만들어내다니 신통방통하다. 자신의 요리철학을 펼치며 자꾸 나를 당황시키는 일을 만들어 문제긴 하지만, 삐질 땀을 흘리며 머릿속의 순서대로 빠르게 재료를 집어넣고 불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웍질을 하는 남편의 뒷모습은 사실 사랑스럽긴 하다.


여보, 이제 나는 그만 놀라게 하고

그대의 요리가 영원하길 바라요.



남편님의 홍합짬뽕재료가 그의 웍에 담긴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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