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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Nov 22. 2024

유별난 쌈장

#보쌈

남들이 <눈물의 여왕>을 보며 여주, 남주 진짜 사귀는 거 아니냐고 흥분할 때도, 친구가 <선재 업고 튀어>를 보며 선재 짝사랑에 빠졌을 때도 남편과 나는 그 인기 있는 드라마 정주행에 실패했다.


희한하게도 "불륜"을 다룬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 줘>는 내 일 같아 몰입이 됐는데 5회차되니 이것도 시들해져 버렸다.


사실 남편과 불륜드라마를 본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인데, 내가 다시 태어나 제2의 인생을 사는 여주로 빙의한 건지 아니면 회복 4년 차의 힘인 건지 여하튼 웃으며 봐졌다.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도 남편은 늘 배달음식으로 야식을 시켜 먹던 남자다. 옷은 고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색의 티셔츠 몇 개를 돌려 입으면서도 맛에 대한 그의 욕심은 끝이 없어 배달음식앱 VIP가 되고 말았다. 우리 야식타임은 언제부터인가 드라마보다는 다큐 3일, 냉장고를 부탁해,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골목식당, 삼시세끼, 서진이네, 백패커, 흑백요리사 등과 같이 늘 요리와 관련된 프로그램과 함께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요리예능이나 다큐 아니고는 티브이를 틀 일이 잘 없다.


김치찌개를 성황리에 비워내고 돌아온 일요일 저녁이다. 잠자리에서도 서로 장난치느라 쉽게 잠들지 않는 아이들 곁에 누웠다가 나온 시각은 밤 11시 30분. 저녁에 마트에서 샀던 1인 갑오징어회를 먹고 있던 야식남 남편은 유튜브에서 "골라듄다큐"를 보고 있었다.


공장의 모습이었는데 머리부터 몸까지 흰색의 모자와 가운으로 덮어쓰신 직원분께서 스텐으로 만든 냉장고 사이즈의 커다란 통 안으로 각종 야채와 양념을 차례대로 쏟아 넣고 있었다. 그 와중에 기계 안에 달린 회오리 같은 모양의 날은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며 던져지는 양념들을 고루 섞어내고 있었다.


"캬~맛있겠다."

매번 느끼지만 야식을 먹으면서 먹는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우리의 심각한 불찰이다.

그가 야식거리를 집을 때는 눈을 번뜩이며

"이거에 소주 한 잔, 기가 막히겠군."

해놓고는 돌아서서 늦은 밤 한 젓가락 집어 맛을 보고 나면, 그 뒤로는 화면에 나오는 맛의 향연에 빠져버리기 일쑤였다. 허우적대는 정도가 아니라 헤어 나오질 못해서 결국은 영상 속에 나오는 알면서도 모르겠는 그 맛을 스스로 맛보기로 결단하게 된다.


"저 집이 어디라고? 여수의 젓갈공장 맞지?"

그는 손가락을 바삐 놀리며 핸드폰을 쳐다보면서도 눈을 왔다 갔다 하며 칠게를 씻고 간 뒤 각종 야채로 버무리는 순간을 포착하고는 감칠맛이 폭발하겠다며 난리를 떤다.


"비리지 않겠어?"

이미 맛집의 각종 음식을 포함해 아빠의 음식평가까지 우리 가족은 이미 흑백요리사의 까칠한 심사위원 안성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맛평가에 진심이다.


"흰쌀밥에 저걸 쓱쓱 비벼먹으면.. 와, 진짜 맛있겠다."

그 정도일지 의심이 드는 찰나 바다향이 가득 느껴지는 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다.

"난 저거! 어리굴젓이나 생굴무침 하나 같이 시켜줘."

이렇게 갈대같이 또 휘말리고 만다. 침이 꼴깍 삼켜지고 그 맛을 상상하는 순간만큼 제일 맛있는 순간이 없다.


"그럼 저 택배 도착하는 날 보쌈해 먹자. 보쌈에 저 젓갈을 쌈장으로 곁들이면 최고겠는걸."

그렇게 한 날의 저녁메뉴가 결정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날들만 남았다.

"고기를 촉촉하게 잘 삶아내야 되는데.. 마르면 퍽퍽하고 맛이 없다고."

"왜 이러시나. 나만 믿으셈."

남편의 호언장담으로 그 밤은 마무리됐다.


대망의 보쌈을 먹는 날이다. 남편은 젓갈뿐 아니라 전라도 보쌈김치까지 주문했단다. 역시 내 남편은 투머치다. 아니, 먹는 것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완벽을 기하는 편이라고 하자. 그 덕에 내 입은 즐거울 테고 슬프게도 주머니는 가볍겠지.


언제 다 넣었는지 벌써 끓고 있는 고기


삼계탕 한방재료를 넣고 삶아서 온 집에 기운도는 향이 퍼진다. 50분쯤 됐을까?

남편이 중식도를 꺼내 들고 앞다리살, 삼겹살, 목살 3가지로 "보쌈 삼총사"를 차려내 온다.


왼쪽부터 목살, 삼겹살,앞다리살


특별한 쌈장까지 곁들인 날이라 도련님초대했다. 퇴근하는 언니네는 알배추에 쌈장, 자른 양파와 보쌈김치까지 챙겨 포장으로 준비해 뒀다.


담백한 걸 좋아하는 나는 삼겹살보다는 앞다리살을 선호하는데 오늘은 대박! 목살이 너무 부드럽다. 지방이 많은 걸 선호하는 남편이나 조카 민이는 삼겹살이 맛있다고 했는데, 각 부위가 모두 촉촉하니 몇 번 씹을 것도 없이 입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그만그만, 너무 급하게 집어들 먹지 말고

오늘의 주인공

생굴무침과 칠게 그리고 미더덕쌈젓을 소환하자.


왼쪽부터 생굴무침, 칠게장, 미더덕쌈젓


나와 도련님은 뭐니 뭐니 해도 굴에 한 표, 남편과 언니는 미더덕에 엄지 척.

아이들의 픽은 원래 보쌈의 단짝, 달달한 전라도 보쌈김치.

혼자 남은 칠게야.. 너는 따로 다시 만나.


'어라? 나 요즘 남편이 요리하는 사진을 제대로 안 찍고 있네.'  

반성하자. 다 먹고 나서 보니 사진이 부족하다. 찍어 놓은 사진은 막 발로 찍어놓았다.

이 연재를 하는 와중인데 육수낼 통에 재료를 넣는 장면이나 중식도로 써는 모습을 당연히 찍었어야지.


왜 그런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하는 거냐 물으신다면,

"다들 아실 텐데 말이죠,  손으로 해 먹는 요리보다 남이 해 준 밥이 몇 배는 더 맛있어요."

그래서 원래 식탐이 없던 내가 요즘 매우 바쁘다. 먹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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