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눈물의 여왕>을 보며 여주, 남주 진짜 사귀는 거 아니냐고 흥분할 때도, 친구가 <선재 업고 튀어>를 보며 선재 짝사랑에 빠졌을 때도 남편과 나는 그 인기 있는 드라마 정주행에 실패했다.
희한하게도 "불륜"을 다룬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 줘>는 내 일 같아 몰입이 됐는데 5회차되니 이것도 시들해져 버렸다.
사실 남편과 불륜드라마를 본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인데, 내가 다시 태어나 제2의 인생을 사는 여주로 빙의한 건지 아니면 회복 4년 차의 힘인 건지 여하튼 웃으며 봐졌다.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도 남편은 늘 배달음식으로 야식을 시켜 먹던 남자다. 옷은 고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색의 티셔츠 몇 개를 돌려 입으면서도 맛에 대한 그의 욕심은 끝이 없어 배달음식앱 VIP가 되고 말았다. 우리의 야식타임은 언제부터인가 드라마보다는다큐 3일, 냉장고를 부탁해,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골목식당, 삼시세끼, 서진이네, 백패커, 흑백요리사등과 같이 늘 요리와 관련된 프로그램과 함께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요리예능이나 다큐 아니고는 티브이를 틀 일이 잘 없다.
김치찌개를 성황리에 비워내고 돌아온 일요일 저녁이다. 잠자리에서도 서로 장난치느라 쉽게 잠들지 않는 아이들 곁에 누웠다가 나온 시각은 밤 11시 30분. 저녁에 마트에서 샀던 1인 갑오징어회를 먹고 있던 야식남 남편은 유튜브에서 "골라듄다큐"를 보고 있었다.
한 공장의 모습이었는데 머리부터 몸까지 흰색의 모자와 가운으로 덮어쓰신 직원분께서 스텐으로 만든 냉장고 사이즈의 커다란 통 안으로 각종 야채와 양념을 차례대로 쏟아 넣고 있었다. 그 와중에 기계 안에 달린 회오리 같은 모양의 날은 아래에서 위로 움직이며 던져지는 양념들을 고루 섞어내고 있었다.
"캬~맛있겠다."
매번 느끼지만 야식을 먹으면서 먹는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우리의 심각한 불찰이다.
그가 야식거리를 집을 때는 눈을 번뜩이며
"이거에 소주 한 잔, 기가 막히겠군."
해놓고는 돌아서서 늦은 밤 한 젓가락 집어 맛을 보고 나면, 그 뒤로는 화면에 나오는 맛의 향연에 빠져버리기 일쑤였다. 허우적대는 정도가 아니라 헤어 나오질 못해서 결국은 영상 속에 나오는 알면서도 모르겠는 그 맛을 스스로 맛보기로 결단하게 된다.
"저 집이 어디라고? 여수의 젓갈공장 맞지?"
그는 손가락을 바삐 놀리며 핸드폰을 쳐다보면서도 눈을 왔다 갔다 하며 칠게를 씻고 간 뒤 각종 야채로 버무리는 순간을 포착하고는 감칠맛이 폭발하겠다며 난리를 떤다.
"비리지 않겠어?"
이미 맛집의 각종 음식을 포함해 아빠의 음식평가까지 우리 가족은 이미 흑백요리사의 까칠한 심사위원 안성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맛평가에 진심이다.
"흰쌀밥에 저걸 쓱쓱 비벼먹으면.. 와, 진짜 맛있겠다."
그 정도일지 의심이 드는 찰나 바다향이 가득 느껴지는 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다.
"난 저거! 어리굴젓이나 생굴무침 하나 같이 시켜줘."
이렇게 갈대같이 또 휘말리고 만다. 침이 꼴깍 삼켜지고 그 맛을 상상하는 순간만큼 제일 맛있는 순간이 없다.
"그럼 저 택배 도착하는 날 보쌈해 먹자. 보쌈에 저 젓갈을 쌈장으로 곁들이면 최고겠는걸."
그렇게 한 날의 저녁메뉴가 결정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날들만 남았다.
"고기를 촉촉하게 잘 삶아내야 되는데.. 마르면 퍽퍽하고 맛이 없다고."
"왜 이러시나. 나만 믿으셈."
남편의 호언장담으로 그 밤은 마무리됐다.
대망의 보쌈을 먹는 날이다. 남편은 젓갈뿐 아니라 전라도 보쌈김치까지 주문했단다. 역시 내 남편은 투머치다. 아니, 먹는 것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완벽을 기하는 편이라고 하자. 그 덕에 내 입은 즐거울 테고 슬프게도 주머니는 가볍겠지.
언제 다 넣었는지 벌써 끓고 있는 고기
삼계탕 한방재료를 넣고 삶아서 온 집에 기운도는 향이 퍼진다. 50분쯤 됐을까?
남편이 중식도를 꺼내 들고 앞다리살, 삼겹살, 목살 3가지로 "보쌈 삼총사"를 차려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