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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이 쩍쩍 달라붙는 국물요리

#스지&도가니&사태수육

by 하루만

밤새 내린 눈으로 덮인 도시의 풍경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곱게 물든 단풍잎을 떨궈버리기엔 너무 따뜻한 가을 날씨 덕분에 말도 안 되게 단풍이 지겨워질 뻔하던 참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한순간에 가을이 새하얀 겨울옷으로 갈아입었다. 베란다 앞 창 틀 위로는 부드러운 눈이 두껍게 쌓여있고,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된 마냥 반짝였다.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남편은 겨울만 되면 으레 스노타이어로 교체를 하고 언제라도 눈이 내리면 뛰어나갈 준비태세를 갖춘다. 대설특보가 내린다고 하면 어서 눈을 맞으러 출발해야 한다고 호들갑 떠는 아빠덕에 우리 가족은 4년간 겨울의 추억을 많이 쌓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길에 처음 발자국을 찍는 낭만부터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지나면 펼쳐지는 짙은 겨울바다 앞에서 듣는 파도의 부서지는 소리, 거기다 한 폭의 수묵화같은 검은 능선이 도드라지는 겨울의 울산바위까지 그간 나를 설레게 하는 겨울은 늘 눈과 함께였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내린 이번 눈은 마냥 설레지만은 않았다. 여전히 매달린 잎들위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은 내게 기후감수성을 일깨워줄 뿐이었다.


이 날 눈은 내게 좋지 않은 마음을 하나 더 갖게 했는데 바로 첫째의 사고소식을 알리는 담임선생님은 전화였다. 학교 보건실에 들어서니 첫째가 겁먹은 표정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울고 있다.

"엄마.. 흑흑.. 발이 180도 돌아갔어. 우두둑하는 소리도 났고."

닭똥 같은 눈물을 얼마나 흘리는지 표현은 안 했지만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다. 후다닥 병원으로 옮겨 MRI를 찍고 난 뒤 선생님께 하시는 말.

"대학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삼면골절에 성장판까지 금이 갔다고 한다. 침울해지고 심각해진다. 창 밖으로 보이는 눈 내린 풍경이 더 이상 로맨틱해 보이지 않는다. 벌써 3번째 깁스를 하는 너는 이젠 조심할 때도 되지 않았냐는 잔소리가 넘치기 일보직전의 주전자처럼 부글부글 끓어댄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손가락을 쭉 뻗은 남편이 반깁스 한 다리를 쿠션 위에 얹고 누워있는 첫째를 보며 지붕이 날아가도록 웃어젖힌다.


"너도 왼발?"

"응? 나도 왼발!"


"나는 캔 차려다 넘어진 거. 너는?"

"난 눈 있는 곳에서 친구 뒤쫓아가다 넘어졌어."

"푸하하하, 그거 정말 아픈데. 아빠 때는 핸드폰도 없었잖아. 나는 땅에 주저앉아 울고 친구가 뛰어가서 사람을 데려왔어."


아니, 그런 것도 유전이 되나. 다리는 왜 똑같이 다치고 난린가. 나는 속 시끄러운데 남편은 침대에 같이 누워 자신의 과거스토리를 들려주며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느라 여념이 없다. 아들은 좀 전까지는 회색빛 근심 어린 얼굴로 통증을 호소하더니 3분 만에 아빠와 수다삼매경에 빠져 깔깔 웃기만 잘한다.


"여보는 애가 수술할 수도 있다는데 당신은 걱정도 안 돼?"

"크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얘들아, 그래서 오늘은 뭘 먹을까?"

역시 어떤 주제든 결국 먹는 걸로 돌아오는 먹보 우리 집 남자들이다.


"잠깐 기다려봐. 옛날 어른들은 뼈에 이게 좋다고 많이 먹었다던데."

폰으로 검색을 마친 남편이 금방 해먹자며 바쁘게 움직인다.

"뭐 하려고? 애들 배고픈데 간단한 거 해 먹자."

남편이 말하는 '금방'의 시간개념은 우리와 매우 다르기 때문에 언제든 재차 확인을 해야 한다.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3~4시간은 족히 걸리는 요리였다. 사 온 고기를 피를 빼고 그걸 생강가루와 통후주, 월계수잎과 미림을 넣어 한 번 데쳐낸 뒤 깨끗이 씻고 지방을 제거해 준다. 손질된 고기를 양파와 파, 마늘을 넣어 약불로 은은하게 3시간을 끓여 완성된 요리는 바로 스지&도가니&사태 수육이다.


위쪽이 도가니, 가운데 사태, 아래가 스지


"캬~~ 국물 죽인다."

본인이 요리하고서 제일 맛있게 먹는 남편은 소주를 부르는 국물이라며 매우 흡족해한다. 나주곰탕 같은 국물위로 3가지 종류의 고기가 이쁘게 돌려놓여있다. 사태는 먹어봤지만 스지나 도가니는 별로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이 직접 떠 주신다.


쫀득한 맛의 스지와 도가니


"이게 진짜 맛있어. 요 부분이 알스지야. 먹어봐."

식감이 쫀득하고 찍어먹는 소스 덕분에 입맛이 돈다. 뒤이어 한 숟갈 국물을 뜨는데 맑으면서도 진한 국물맛이 일품이다. 무엇보다 입술이 쩍쩍 달라붙는다.


"이게 도가니야. 뼈에 좋다고 어른들이 드신다는 거. 너 많이 먹어라."

진짜 뼈에 효능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아들을 향한 아빠의 마음 아닐까. 아들이 뜨뜻한 국물을 먹고 다친 뼈가 쩍쩍 달라붙는 마법이 일어나면 좋겠다.




이 글을 정리하는 지금 나는 불 꺼진 입원실의 첫날밤을 경험하는 중이다. 결국 수술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고 부기가 빠져야 수술이 가능해 먼저 입원을 하게 되었다. 중요한 일정과 겹친 나는 이미 지친상태고 남편은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온 집을 다 옮길 테세다.


"나 때문에 가족들이 다 피곤해진 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네.."

눈물 많은 첫째가 말을 흐린다. 이때다 싶어 그 말을 받아 채 꼭 하고 싶은 말을 전해본다.

"이럴 때일수록 가족이 빛이 발하는 거지."


아이의 수술이 잘 끝나고 온전히 회복되길 간절히 기도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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