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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시간의 구애

#사골곰탕

by 하루만 Dec 03. 2024

"브이로그, 입원 첫째 날."

하늘색 환자복을 입고 같은 색 침대에 누운 첫째가 입술 앞에 휴대폰을 가져다 대고 중얼거린다.

마침 식사시간이라 침대식탁을 펼치고 앉아 저녁으로 나온 음식뚜껑을 하나씩 열어 보이며 설명을 덧붙인다.


"와그작와그작."

처음 입실했을 때의 낯섦과 수술에 대한 두려움은 살짝 가라앉은 건지 먹성 좋게 음식을 흡입하며 그 모습을 영상에 담는다. 나는 힐끗 쳐다보며 저렇게 클로즈업해도 나중 볼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하는 별스런 걱정을 한다.


"시래기된장국이 나왔다면 더 좋았을 텐데.."

작은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반찬으로 나온 닭강정 덕분인지 병원밥치고는 꽤 괜찮다는 평을 내려주시는 요리비평가 아드님이시다.


"내가 왔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남편과 둘째가 도착했다.

"아이템 다 챙겨 왔지."

눈빛을 반짝이며 손에 든 봉지를 들어 보인다.


나보다 먼저 입원실을 확인했던 남편이 제일 먼저 챙겨 온 것은 멀티탭과 충전기, 핸드폰거치대였다. 그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어야 하는 아들을 위해 디지털 세상을 구축해 주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했나 보다. 정말이지 포노 사피엔스가 따로 없다.


"하루종일 누워서 폰만 보라고?"

폰 사용량을 가지고 아들과 늘 씨름해야 하는 내가 깜짝 놀라며 쳐다봤다.

"내가 다쳤을 때는 누워서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게 얼마나 지루하고 괴로운 줄 알아? 하다못해 만화책도 없었어. 내가 빌려온 걸 아버지가 보시고는 다 찢어버리셨지.."


어릴 적 아버께 받은 상처가 깊은 남편은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하다 상처가 들춰질 때면 곧잘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빌려온 책들을 다 찢어버리냐? 초등학생인 내가 그걸 책방에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몰라 쩔쩔매고 힘들었던 게 아직 생각이 나."


사실 책을 찢었던 건 아주 교양 있는 일에 불과할 만큼 그와 아버지의 갈등이 깊었다는 사실을 나는 결혼 후 살면서 알게 되었다.

'결혼 전에 분명 그의 집에 갔었는데?' 너무 의아했다. 내가 가서 봤던 사이좋은 모습들은 다 가식이었던 건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사랑을 받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자기식대로 자식을 끔찍이 대했고 그 잘못된 사랑법은 그를 숨 막히게 했던 거 같다.  남편과 사는 동안 둘의 다툼은 주기적으로 일어났는데 하루는 결혼한 며느리 앞에서 아들과 다툰 것이 머쓱하신지

"원래 아들 있는 집은 다 이래."

라며 아버님이 퉁치듯 말씀하셨다.


사실 우리 때 아버지와 큰 아들의 관계가 친밀하고 원만하기란 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적 성장의 황금기를 보내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정작 아이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배운 적은 없었다. 아버지의 말이 법일만큼 가부장적이고 유교적 사상이 강했으며 자식을 기를 때도 억압적인 면이 있었다.  부모입장에서 공부 외에 다른 것은 전혀 용납되지 않는 시절로 사랑의 매가 허용되던 때가 아닌가.


사랑의 회초리 딱 한 대로 그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아버님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데 늘 실패하셨다. 대한민국의 성인 중 약 52%는 '분노조절장애'를 갖고 있다는 조사(대한신경정신의학회 2015년 조사)처럼 아버님도 자신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 아들에게 화가 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는 분을 못 이겨 기물파손과 폭력을 감행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도 커서 같은 자식 낳아봐라!"

남편은 아버님이 자기에게 그렇게 얘기했다며 종종 말하곤 했다.

"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어."

부모님의 감정표현이 아이에게 그대로 학습된다는데 그런 환경 속에 자란 남편 역시 욱하는 성질이 있다. 하지만 이제껏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자기 인식과 노력으로 '원죄는 대물림된다'는 공식을 깬 그가 대단해 보였다.


"나는 주어온 자식이 아닐까? 늘 고민했고 나에게 가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과 이렇게 우리 가족이 생겼잖아. 애들이 커가는 하루하루가 아깝고 소중해."

그는 이제야 자신의 편이 생겼다고 말하며 빙긋 웃어 보인다.

'집 나가기 전에 그 사실을 좀 깨닫지 그랬니?'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그의 어린아이가 우리가 노력한 4년간의 가정 안에서 회복되고 치유받는다는 걸 느끼기에 감사한다.


내가 병원에서 첫째를 돌보는 동안 그는 집에서 혼자 사골을 끓이고 있다.

가스레인지 위에는 사골이 가득 든 들통이 끓고, 그 앞에 서 있는 남편 가슴에는 다 떠나보내지 못한 상처끓고 있다.


"이제 부모님도 나이 드셨고.. 자기가 용서해 드리고 그 기억들 다 떠나보내."

몇 번이나 남편에게 말했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다.


피를 잘 빼내는 건 곰탕의 기본피를 잘 빼내는 건 곰탕의 기본
뜨겁게 데쳐낸 뼈에 붙은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은 꽤나 힘이 드는 노동이다.뜨겁게 데쳐낸 뼈에 붙은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은 꽤나 힘이 드는 노동이다.



남편은 손이 많이 가는 곰탕을 왜 꼭 끓인다고 하는 걸까?

사골의 피를 몇 시간에 걸쳐 빼내고 그걸 데쳐서 깨끗이 손질하는 건 보는 내가 다 지치는 노동이다. 깔끔해진 사골을 들통에 넣어 불을 켜고는 그 앞에 뒷짐진채 서 있는 그를 보노라면, 마치 사랑하는 이가 도착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 같다. 그는 그렇게도 요리하는 게 좋은 가 보다.


6시간씩 3번에 걸쳐 총 18시간의 긴 구애를 끝으로 뽀얀 얼굴을 드러내는 사골곰탕처럼 그도 길게 길게 끓여낸 상처를 끝으로 부드러운 새살이 돋아나길 소망해 본다.


18시간의 구애, 사골곰탕18시간의 구애, 사골곰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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