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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Nov 19. 2024

싸움의 발단, 묵은지

#김치찌개


토요일 아침 남편과 나에겐 해결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묵은지 6킬로였다. 내일 교회모임에 끓여가기로 한 김치찌개 30인분을 위한 재료수급인 셈이다. 준비성 좋은 남편이 일찌감치 온라인으로 주문했으나 필요한 당일까지 오지 않는 바람에 급한 대로 마트에서 구입하기로 했다.


장보기 전 선 식사를 위해 음식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남편이 말했다.

"식자재에 가볼까?"

그의 물음에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딱 잘라 말했다.

"난 거기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짤막하게 내가 가진 테이터에서 산출된 값을 그에게 알리고자 툭 던진 말이 아뿔싸, 세상 어이없게 그게 문제가 됐다.


"하아.. 왜 말을 그렇게 하지?

가봐서 있으면 땡큐인 건데 그냥 한번 가보자 하면 될걸.."

그는 내 대답이 무슨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들리는 건지 싸해진 표정으로 입을 꾹 닫더니 뚫고 들어갈 틈이 없는 철옹성이 되어버렸다.

"아우 씨, 밥 먹으러 가지 말자."

그러고는 차를 획 돌려버린다.


저기요. 뭐라고요?

금방 내가 한 대답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어. 좀 단정짓 듯한 말투긴 했는데, 당신을 기분 나쁘게 할 의도 같은 건 없었다고. 식자재에서 못 봤다말한 게 기분 나쁜 거야?


그는 조수석에 앉은 내 몸이 오른쪽으로 휙 틀어질 만큼 핸들을 거칠게 휘감아 유턴을 해버렸고, 너무 어이없던 나는 길가에 지나가는 분을 붙들고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하며 열불을 토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저 놈의 성질머리는 왜 저 모양일까?'

정말 속이 뒤집어지게 화딱질이 나서 그에게 한 마디 톡 쏘아붙였다.


"당신 아침에 기분 나빴던 일 가지고 지금 나한테 다 덮어씌우는 거 아니야?"


오전에 있었던 일 중 하나는 근교로 나가서 맛집을 가기로 한 약속이 15분 전 갑자기 무산됐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몇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든 건담을 아들 둘이서 장난치다가 떨어뜨린 것이다. 그는 그걸 떨어뜨리고서 본인에게 사과는커녕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아이들의 행동에 화를 버럭 냈다. 신경이 긇힌 상태에서 출발했던 우리는 둘 다 조금 예민했던 것 같다.


이미 화가 난 남편은 차를 돌려 주차장에 도착했고 혼자 가서 사 오겠다며 손으로 내리라는 시늉을 한다. 쿨하게 문을 열고 내려서 휙 돌아 집으로 올라가는 나를 상상하는데 데쟈뷰같은 어떤 찔림이 나를 멈칫하게 한다.


처음이 아니다. 슬프게도 신랑이 나의 말투에 화를 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이다.

'아차차.."

각자가 생각하는 소통의 방식이 있겠지만 특히 남편은 상대방의 의견 먼저 수용해 주는 대화법을 좋아다. 이를테면 내가 전하고 싶은 말 에 "그럴까?"를 붙이는 간단한 방법이다. 이를 활용한 적절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럴까? 사실 난 식자재에서 묵은지 대용량을 본 적은 없는데.. 귀찮긴 하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나는 아까 우리가 이야기한 대로 우리가 사고 싶은 브랜드 묵은지 6kg가 이마트에 있을 거 같긴 해."


사실 첫째도 남편처럼 나와 대화할 때 엄마의 부드러운 반응을 기대다. 즉, 그들과 대화할 때에는 그들의 뜻을 아들이는 반응을 보인 뒤 나의 제안을 곁들인다면 아무런 탈이 없다는 것이다.


화평한 가정을 위해 잊지 말아야 하는데 요 며칠 무탈한 탓에 살짝 방심했다고 해두자. 사실 개와 고양이처럼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 본능적으로 다른 접근방식을 취한다. 그러다 보니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오해가 생고 심하면 불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혼 14년 차인데도 소통방식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니 아직 내공이 멀었나 보다. 내가 우리 집 남자 셋의 개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쩌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그대 인지도.


"무슨 벽이랑 대화하는 느낌이야. 왜 그렇게 말해?"

"여보, 미안해.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사실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다름으로 인정하고 서로 조심해 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조심을 못했군.

흠흠.. 음식 하는 게 얼마나 큰 봉사인데 다 큰 남자가 심각하게 삐치면 답도 없다. 얼른 내가 먼저 다가가 뚱해있는 마음을 만져주. 이래서 한 지붕 아래 상처 주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집으로 돌아와 뉘엿뉘엿 해가 지고 시작부터 꼬여버린 주말은 안타깝게 흘러만 간다.

'내일 준비해 간다던 김치찌개는 어쩌지? 지금 저 사람 기분으로는 전혀 끓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남편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건만 연달아 남편의 발이 식탁에 부딪히고 배달한 점심이 늦어지는 등의 작은 악재가 계속되면서 짜증으로 휩싸인 그를 거리를 둔 채 지켜만 다.


어느새 깜깜한 밤이다.

"여보~~ 이제 그만 삐쳐. 그렇게 말 안 할게. 응?"


있는 대로 그의 팔을 흔들어대니

"삐쳐봤자 뭐 하냐."

경상도 남자의 화가 풀렸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로 밤 열 시가 되어서야 장을 볼까 하며 채비를 한다.

그래서 묵은지는 결국 어느 마트에서 샀냐고?

시간의 제약이 없는 다농마트.



늦은 밤 재즈 들으며 김치를 쏭쏭 써는 남편


는 무슨 일이든 마음이 정해지고 나면 척척박사인 머리, 그리고 손과 함께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시킨다. 북어대가리 붙은 아가미를 일일이 떼내어 육수를 끓임과 동시에 양파와 파, 목살을 손질해 주고  김치도 송송 썰어 준비하니 이를 어쩐다. 순식간에 30인분이 아니라  50인분은 되는 양이 완성됐다. 



대용량 찌개를 식히는 중



꽤 선선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혹시라도 빨리 식지 않상할까 봐 개수대에 물을 받아 얼음을 넣고 식힌다. 새벽 2시다. 찌개를 담아갈 통에 옮기고 나서 이제 에너지가 방전된 나는 요리한 들통은 내일 씻을 요량으로 밀쳐두는데 기어코 남편이 자기가 씻어서 정리해 둔다며 세제로 거품을 낸다. 삐쳤던 내 남자가 새벽이 되어서야 서윗한 남편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뒷날 모임에 완성된 김치찌개를 들고 안전하게 참석을 했다. 단출하게 차려진 점심은 밥 위에 계란프라이, 김과 김치찌개가 전부였지만 국물맛을 보시고는 다들 맛있다며 한 그릇씩 더 드셨다.

"캬~ 이 집 김치찌개 맛집이네요."

기분 좋으라고 해주시는 말인지 몰라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통 깊은 맛 낸다고 양념만 심하게 때려 넣는 집도 있는데 이 김치찌개는 자극적이지 않고 색도 은은한데 국물이 깊은 맛이 나요. 비법이 뭐예요?"

평소 퇴근하고 집에서 요리를 한다는 남자분의 질문에 정작 요리한 사람보다 내가 신이 나 대답한다.

"밖에 음식은 조미료 폭탄에 엄청 맵게 하는데 이건 그렇지 않죠? 저흰 육수를 냈어요. 황태육수."

그리고는 말린 황태머리에 붙은 단단한 아가미를 떼다가 남편 손톱이 나갔다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까지 쏟아낸다.


커다란 들통에 한가득 끓여간 김치찌개가 텅텅 비고 남편에게 김치찌개 레시피를 묻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 걸 보면서 어젯밤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신 맛과 맵기를 선호할지 남편과 고민했던 대화가 떠오른다.


'역시 이 맛이 통할 줄 알았어.'

요리는 먹는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마법과도 같다. 누구보다 남편이 그렇게 고민하고 애쓰며, 여러 가지의 레시피로 우리 가족에게 끝도 없이 테스트를 하고서야 찾은 김치찌개 레시피 아니겠나. 뿌듯한 마음에 남편을 향한 고마움까지 더해진다.


묵은지, 남편과 대화가 막힐 때마다 널 떠올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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