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의 긴장이 풀어지고 눈도 좀 더 붙였던 지난 주말은 나른하고 한가지게 시간을 보냈다.그렇다고 침대에 내내 누워있는 성격이 못 되는 나는 이불빨래를 돌리며 아이들 방에서 비워낼 품목들을 선별했다. 최종 컨펌은 배드민턴 수업을 받으러 간 아들들의 몫이라 방 한쪽 구석에 물건을 모아두는 것으로 끝을 냈다.
"캬, 간지 제대로다."
남편은 자신의 작업대에서 핀셋으로 작은 스티커를 떼어 조심스럽게 건담 오른쪽 다리에 붙이더니 완성된 자태를 보고는 경탄을 쏟아낸다. 이렇듯 작고 세밀한 부품들을 들여다보며 디테일한 작업을 즐기는그의성격은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듯하다.
"저녁에 언니네 불러서 같이 저녁 먹자. 미역국이랑 고등어 구워서."
하루 할당량의 건담 작업이 마무리가 된 건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연락하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인즉 국을 적어도 15리터 냄비에 끓인다는 뜻이다. 4인가족인 우리 집은 국을 끓일 때 한 번도 4인분만 끓인 적이 없다. 많은 양의 미역국을 끓여내는 것은 그에게 아주 하찮고 쉬운 일이었으며, 이렇게 끓여진 대용량의 국은 가히 어느 맛집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흡입하며 먹는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 맛의 진가를 인정받고 있었다.
"다음 주 목요일에 민이 수능 치잖아. 그날 민이 점심을 이모한테 부탁할까 하는데.."
주말저녁 남편이 끓여준 미역국에 코를 박고 사발째 드링킹 하던 언니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말을 꺼냈다.
"뭐? 나한테?"
워킹맘에다 아이가 셋이라 바람 잘날 없는 언니는 3년 전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마침 형부가 베트남 주재원으로 나가게 되며언니가 택한 비빌 언덕이바로 나였다. 어떤 바람도 막아줄 정도의 높은 산봉우리와 우람한 산등성이는 내게 없었지만 '가장 편안'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애정하는 친동생이기 때문이다.
"응. 이모도시락이 아무래도 더 맛있을 거 같아."
내 언니는 이럴 땐 좀 뻔뻔하다. 그래도 밉진 않은 건, 두 손을 깍지 끼고 진심 어린 표정으로 동생에게 아양을 떠는 재주가 있어서다.
"네가 해주는 게 너어어무 맛있어."
남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애교임과 동시에 길게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나는 그만 승복하고 만다.
"제부~ 미역국 이거 팔아요. 나 같은 사람들은 국 사 먹고 싶어 해. 이건 정말 가게 차려야 해. 가게 차릴 거면 나도 좀 투자할게."
투자한다는 말에 나는 웃음보가 터지고, 남편의 어릴 때부터 채워지지 않던 구멍 난 인정욕구가언니의 칭찬으로 가득 메워진다.참으로 우리는 각기 다른 개성과 재능으로 서로를 더 풍요롭게 한다. 인생을 살아가며 누군가와 오랫동안 관계 한다는 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처럼 얽히고설켜 일상 속에 서로를 깊이 의지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하도록 해주는 것 같다.
"내가 해줄게. 수능날 점심!"
이 말을 기다린 건지 당사자인 조카 민이가 쩍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며 호들갑을 떤다.
"그럼 대박인데요. 그날 학교 전교생 중에 제 밥이 제일 맛있을 거 같아요."
아니, 내 남자의 손맛이 그 정도였단 말인가!
과찬이 선을 넘고 담을 넘어 꼭대기로 솟구쳤으나 기분은 좋았다.
수능 전날 저녁 남편이 묻는다.
"내일은 몇 시에 일어날까? 새벽 5시 반에는 일어나야겠지?"
"고기도 다 재워놨고 국도 끓여놨는데 그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지. 내가 밥은 할 테니까 당신은 고기만 볶아줘."
"에이, 무슨 소리야. 사람이 일어나서 정신을 차려야지. 7시에 출발할 거니까 한 시간 반 전에는 일어날게."
결정하고 나면 번복 없이 밀고 나가는 사람이라 '그건 에너지 낭비'라는 말을 삼킨다. 자기 전까지 쌀을 한 시간을 불릴지 30분을 불릴지를 가지고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작은 부분까지 세심함이 넘치는 그와 함께 미션을 수행하려면 간이 약한 나는 지칠 때가 많다.
새벽 다섯 시 반.
알람이 울렸다.
메리야스 차림의 그는 어떻게 하면 고기 한 입을 넣자마자 행복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웍에 불을 붙인다.
"고기엔 불향이지."
토치질을 하며 적당히 수분을 날리기 위해 웍질에 집중한다. 운동도 하지 않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근육이 이두, 삼두 그리고 전완근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메리야스에 팬티바람으로 토치질을 하며 이븐하게 고기를 볶아낸다
웍질을 멈춘 그가 신중하게 간을 본다.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다면 저 고기는 쓰레기통으로 버려질 것이므로 나는 살짝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본다. 합격을 받고서야 도시락통으로 고기를 옮겨 담으며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나의 첫 연재 [치유행 열차에 탑승하셨습니다]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저 사람이 내 남편 맞나요?'
재차 스스로 질문하는 내 모습이 이해가 되실 거다.
"저녁을 남편이 해준다고?"
남편과 통화하며 저녁메뉴를 묻는 나를 아내분들은 부러워한다. 그가 부캐로 우리 집 셰프가 되기까지의 일들을 다 말할 수가 없어 그저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지만 아시다시피 집 나갔다 돌아온 남편아닌가.
내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는 이가 언젠가 물었다.
"아직도 이혼하고 싶어?"
"예전 그 일은 다 잊은거야?"
물론 그는 나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어떻게 그 일이 없던 일처럼 말끔히 지워질 수 있을까?
만약 지금 당장 우울에 빠져들겠다 마음만 먹는다면 나는 언제든 접어둔 상실을 꺼내 분노와 증오를 활활 타오르게 할 자신이 있다.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오늘도 기적 같은 새 날을 기록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미친 실행력이 올바른 목표설정과 함께 꽃 피우고 있는 '현재의 그'만 보기로 내가 매일 매 순간을 선택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