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로 돌아가다
2021년 01월 01일 SEL-SYD
나, 남편, 그리고 두아. 우리 세 가족은 시드니행 비행기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비행을 더 자주 하게 되었다. 호주에서 잠시 나와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한국으로의 역이민을 결심했고, 그냥 두고 떠나온 호주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은 혼자 가서 후다닥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길 원했지만, 나도 가고 싶었다. 호주에서 나올 때 잠시 한국행이라는 생각으로 나와서 그런지, 이대로 호주에 다녀오지 않고 한국에 남아있는다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았다. 내 맘속의 호주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잠수이별은 최악의 이별이 아닌가.
이제 막 돌이 지난 두아도 데려가야 하는 상황에도 나는 고집을 부렸다. 그렇게 우리 세 가족 다 같이 호주를 갔다가, 정리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한다. 그런데 우리가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단 한국에서 호주로 가는 비행 편이 없었다. 호주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 편은 드물게나마 있었지만, 한국에서 호주 가는 일정 자체가 예정되어있지 않았다. 항공사에 전화해서 문의해봤지만, 아직 정확히 말씀드릴 수 없다는 고루한 답변만 들었다. 나는 12월 한 달 동안 매일 시간이 나는 대로 항공편을 검색했다. 그러다 12월 중순 경 새벽에 자기 전 누워 휴대폰으로 스카이스캐너에 새해 1월 1일 자, 시드니행 티켓이 오픈된 걸 발견했다.
이거 (티켓) 끊을까? 어떡해? 끊어?
어. 얼른 결제해.
남편의 결제하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여권을 챙겨 와 좌석을 예매했다. 두아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시기라 무료로 내 무릎 좌석에 앉아 갈 수 있지만, 나와 남편은 이미, 한국으로 오는 비행에서 한 번 털려(?) 봤기에 우리 사이에 자리 하나를 돈을 더 내서라도 끊기로 했다. 그러나 자리 확보를 위해 소아 나이로 임의로 변경해서 결제 진행은 불가했다(생년월일 불일치로 결제 진행이 안됨). 일단 우리 부부의 2장 티켓과 두아 무료 좌석을 예매 후, 항공사에 바로 전화해서 직원에게 우리 예약번호를 알려준 뒤, 무료 좌석이 제공되는 유아이지만 소아 좌석을 추가 결제해서 좌석을 확보해달라고 얘기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2021년 01월 01일 아시아나 인천-시드니 행을 확정시켰다.
결제하고 보니 출발 날짜가 2주도 남지 않았다. 마음이 갑자기 급해졌다. 2주 후 6개월간의 한국살이를 정리하고 다시 호주로 간다. 하지만 목적이 달랐다.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정리를 하러 가는 것이었다.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다시 캐리어를 꺼냈다. 사람 마음이 이리도 간사한가. 캐리어를 보니 복잡한 마음에서 마치 여행 가는 기분으로 조금씩 바뀌었다.
한국은 추운 겨울이지만 우리가 갈 호주는 한 여름이다. 다행히 짐은 가벼울 듯했다. 캐리어 하나는 간간히 우리 집을 봐주던 멜버른에 사는 지인에게 줄 선물들과 우리의 옷 짐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설 격리 시 먹어야 할 우리의 일용할 양식(=한식)이었다. 비행은 지난번 호주에서 한국 올 때 한 번 해봐서 각오는 되어있었지만 문제는 시설 격리였다. 한국에서는 자가격리가 가능하지만 호주는 무조건 시설 격리이다. 좁은 호텔 안에서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15개월 아기와 2주를 함께 해야 한다. 상상으로도 가늠이 안 되는 일이라 이건 그냥 직면하는 수밖에 없다. 가는 날이 정해지니, 차라리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 가고 싶었다.
드디어 우리는 비행기에 탔다. 우리가 탄 칸에는 서비스하는 승무원 3명. 그리고 승객은 우리 3명이 전부였다. 코로나 걱정이 무색할 만큼 아니 오히려 여기는 청정구역이었다. 전세기를 타본 적이 없지만, 지금 타보고 있다고 해도 될 거 같았다.
이제 막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두아는 10시간이 넘는 비행 동안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쉴 틈 없이 계속 걸어 다녔다. 정말 감사하게도 승무원들이 너그럽게 이해해주셨고, 아이 때문에 눈치 볼 다른 승객 없이 비행을 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2주간의 시설 격리는 지독히도 느리게 흘러갔다. 발코니 없는 룸이었지만 방 1개 화장실 1개, 거실, 그리고 식사를 해 먹을 수 있는 부엌과 세탁기와 건조기까지 있는 아주 인간적인 환경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니 절대 인간적인 건 아니다. 아무리 5성급으로 시설이 두루 갖춰져 있다 해도, 자유 그거 하나가 없다면 감옥이다.
2주 동안의 시설 격리가 끝나고 시드니에서 멜버른으로 향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의 호주집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집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장장 6개월간 빈집이었기 때문에 어딘가 문제가 있어도 분명히 있을 거였다. 우리가 한국으로 갈 때 언제 돌아오게 될지 몰라서 수도도 잠그고 전기까지 다 내리고 떠나느라 냉장고 전원도 끄고 갔는데, 그게 미련한 짓이었다. 냉장고 안에 음식들을 모두 비운다고 비웠지만 닫힌 채로 돌아가지 않던 냉장고는 문을 열자마자 트림하듯 썩은 내를 내뿜었다. 곰팡이와 악취가 말도 못 했다. 알코올로 냉장고를 절여가며 반나절을 닦았다. 냉장고부터 켜야 장을 보든 밥을 해 먹든 뭘 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 멜버른은 한여름이 아닌가.
버리고, 고치고, 쓸고 닦고.
그렇게 방치되어있던 집을 다시 일상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하나씩 팔기 시작했다.
호주는 한국의 당*마켓처럼 gumtree라는 중고물품 매매 사이트가 있다. 카테고리가 정말 다양하다. 집 근처뿐만 아니라 저 멀리에 사는 사람도 검색이 가능해서 웬만하면 다 팔리는 곳이다. 물론 끝까지 안 팔리는 것들도 있다. 아직 우리가 여기 살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적당히(?) 팔아야 했다. 사실 호주를 들어오는 건 우리 마음일지라도 한국으로 나가려면 또다시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도 이번은 아주 한국으로 나가는 거라 승인이 안 나오진 않을 거 같았지만, 그래도 호주 정부는 늘 그렇듯 한 번에 승인을 해주지 않는다. 예상했던 시나리오.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료를 추가해서 우리가 호주를 (당분간) 완전히 떠날 것이라는 걸 다시 어필하고 또 했다. 결국 우리는 호주를 떠나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다. 그리고 우린 4월의 어느 날. 한국으로 들어가는 티켓을 예매했다. 시간이 없었다. 남편은 집을 하나 둘 손보기 시작했고 집 주변에 쌓여있던 쓰레기들도 버렸다. 일반쓰레기가 아니라서 수거차를 하나 불러서 300불을 내고 버려야 했다. 고철 덩어리부터 돌덩어리, 나무 조각 등 모두 버렸다. 나는 두아를 돌보며 집안 물건들을 정리해나갔다. 방하나를 비우고, 거실을 비우고, 부엌, 가구, 침대, 가전, 그리고 마지막 자산, 차도 팔았다.
차는 정말 마음이 아팠다. 우리 힘으로 처음 산 BMW 였다. 이 차로 말할 거 같으면, 내가 처참하게 뺑소니를 당해서 트렁크부터 뒷자리까지 종이 쪼가리처럼 쭈그러들었던 닛산 중고차를 폐차시키고 새로 산 차였다. 뺑소니를 한 번 당해보니 좋은 차를 타야겠다 싶었다. 호주는 한국처럼 cctv가 지천으로 달려있는 나라가 아니어서 그렇게 뺑소니를 당하면 잡을 수가 없다. 결국 보험금으로 받은 9000불에 우리의 피 같은 돈으로 새 차를 뽑았다. 다달이 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지만, 퇴근길은 드라이빙만으로도 피로가 씻겨나가듯 행복했고, 두아를 낳고는 여기저기 안전하게 가족 여행도 많이 다녔다. 팔고 싶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우핸들을 운전하는 건 아주 불편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줄 알았다면, 혹시라도 정말 가게 된다면, 불편해도 한국에서 좀 타다가 다시 호주로 가지고 들어가면 몇 만불은 아끼는 셈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확실한 계획이 있어야 돈을 아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문제다.
그래도 여행은 늘 계획한다. 가고 만다. 나는 역이민을 앞두고 또 여행을 계획했다. 남편은 하자가 수두룩한 집을 손보느라, 또 나와 함께 두아를 보느라 지칠 대로 지쳤고, 케언즈 여행을 갔다가 한국으로 들어가자는 내 의견에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라.라고 대답을 일축했다. 하루 종일 여행 루트를 짜고, 항공권도 날짜와 시간도 바꿔가며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시간으로 가장 저렴한 날들로 고르고 골랐다. 어딜 가야 하는지 유튜브와 구글을 맨날 검색하며 찾아보았고, 보트 예약은 물론 액티비티까지 예약했다. 아마 영어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어쩌면 나는 호주를 안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늘 나와 뜻을 함께 했던 남편은 이번 여행은 내키지 않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나의 의견에 따라주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내가 선두에 섰다. 모든 스케줄의 예약과 확인, 그리고 필요한 서류 등을 모두 내가 챙겼다. 남편은 두아만 챙겨주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부랴부랴 집을 비우고, 멜버른 시티에 임시 거처를 마련한 후 먼저 시드니행 비행기를 탔다. 케언즈 여행 일정에 앞서서 시드니에 살고 있는 남편과 친한 형과 그의 가족들을 방문하기로 했다. 물론 나도 알고 지내는 가족들이었고 너무 보고 싶었던 사람들이었다. 한국으로 아예 돌아가기 전 마지막 만남이었다. 호주는 여전히 펜데믹 상황이라 주 경계를 수시로 열고 닫았다. 다행히 빅토리아주(멜버른)에서 잠시 들릴 뉴사우스 웨일스(시드니) 그리고 우리가 여행 가는 퀸즐랜드주(케언즈) 모두 보더가 열려있었다. 하지만 여차하면 언제라도 닫힐 수 있는 그런 상황. 그럼에도 나는 여행을 감행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호주를 두 번 다시 못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여차저차 힘들게 호주에 돌아와도 케언즈 여행은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는 위시리스트 중 하나가 될게 뻔했다.
18개월짜리 아기를 데리고 비행을 하고 배를 타고 캐언즈 망망대해에 가서 스노클링을 하고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한 결과는. 넋이라도 있고 없게 힘들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잘 다녀왔다. 아마 그 여행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힘들었던 이유가 첫 번째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호주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여행이어서.
멜버른에서는 보지 못한 호주의 아름다움을 보고 왔다. 확실히 사람은 경험을 해보는 쪽이 덜 후회한다. 하지 않고서 후회하는 거보다 경험한 뒤 후회하는 게 낫다는데. 모든 일들에 적용되는 건 아니지만 여행이라는 카테고리에는 정말 확실한 진리이다. 여행은 일단 가는 게 남는 거다. 여행은 나의 인생에 흔적을 남긴다.
한국에 돌아왔으니, 호주에서의 이민생활도 장기간의 여행이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호주에서 4년이라는 시간은 나의 인생에 대단한 흔적을 남겨주었다. 나의 인생은 그 흔적들로 인해서 꽤 달라졌을까. 아니면 아름다운 실수였을까. 이민을 가지 말았어야 내 인생은 좀 더 편안했을까. 이제 한국으로의 역이민을 한다. 나는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쩌면...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