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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daugust Oct 07. 2022

#16 Lockdown

코로나를 맞이한 이민자들

두아의 백일



 두아는 호주에서 100일을 맞이했다.

나와 남편 그리고 두아. 이렇게 셋이서 두아의 백일을 축하했다.

멜버른 한인 떡집에서 백설기 떡을 맞췄고, 다른 떡들도 좀 더 주문해서 두아의 탄생을 축하해주신 지인 분들에게도 나누어 드렸다.

 오래간만에 화장대에 앉아 10년 전 유행하는 메이크업을 하고 먼지가 쌓여가는 행거에서 고르고 골라 그나마 예쁜 옷을 입었다. 하고 갈 곳이 없어서 한 번도 햇빛을 못 본 이어링은 유난히 반짝였다. 호주에서 백일을 맞이했지만 한국식 백일상을 고수했다. 저렴한 티는 안 나고 예뻐 보일 수 있는 아이템들을 몇 날 며칠 마트에서 살다시피 하며 골랐다. 종잇장 처럼 휘청이는 싸구려 삼각대에 카메라를 겨우 얹어 놓고 그렇게 백일 사진을 찍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면이 부족했지만 즐거웠다. 문득 가족들이 생각났다. 이렇게 축하할 일이 생기면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더 그리워진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가족들과 나누지 않고 우리 부부끼리 안고 가는 건 상관없는데, 이렇게 좋은 날 행복한 순간은 꼭 가족들과 나누고 싶어 진다. 그걸 못한다는 것이 이민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매일 화상전화를 해도 스크린 너머로 전해질 수 없는 그 무언가. 채워질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이제 두아도 100일을 넘겼고) 우리 부부는 2년 만에 한국으로 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계획은 틀어지기 마련이다. 한국행을 계획하기가 무섭게 코로나가 터지고야 말았다.

처음 코로나가 중국에서 시작되었을 때는 중국에서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중국 전역은 물론이고 점점 아시아 유럽 미국 등지로 펴져나가고, 남쪽 외딴 섬나라 여기 호주에도 상륙하였다. 이것이 심상치 않은 전염병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매일 뉴스를 보던 우리는 예약해 두었던 한국행 티켓을 결국 취소했다.

 호주는 코로나를 잘 이겨내는 듯했다. 하지만 마스크도 쓰는 둥 마는 둥 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전파가 안될 수가 있나. 여러 구멍으로 솟구쳐 올라온 바이러스는 호주를 덮쳤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 숫자에 호주 당국은 부랴부랴 보더를 막았다. 해외 여행객들은 호주를 들어올 수 없고, 호주에 살고 있는 호주 시민권자, 영주권자들은 당국의 허가 없이 해외로 출국할 수 없다. 다른 주 이동도 불가. 처음 맛보는 고립이었다. 이뿐이면 다행이었다. 호주는 가장 비상 단계인 lockdown을 실시한다.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 직장인들은 회사도 가지 않는다. 집에만 있어야 한다. 생필품을 판매하는 마트만 단축 운영을 한다. 외출은 집 반경 5Km 이내에 있는 마트에 생활용품 사러 가는 것만 허용된다. 나쁜 점만 있었던 건 아니다. 내가 벌었던 소득에 비례해서 해당하는 지원금을 받는다. 당연히 직장을 갈 수 없으니, 경제적으로 지원이 필요했다. 우리는 2주마다 정부로부터 돈을 받았다. 그리고 자가를 소유한 사람은 은행에 내야 했던 모기지 이자+원금을 6개월이나 멈춰주었다. 이 제도는 정말 파격적이었다. 다달이 나가던 집값 이자를 당장 안내도 되니 일을 못하고 집에만 붙어있었는데도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코로나가 모두의 예상보다 아주 길고 깊게 전 세계에 잠식했다. 전쟁만이 재난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정말 고국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생겨나고 떨어져 있는 가족들의 안녕이 겁나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은 우리 부부만 가졌던 게 아닐 것이다. 전 세계의 모든 이민자들이 한 번쯤 떨어봤을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도 크지만 당장 닥친 현실이 더 무섭다. 일자리를 잃고, 집세를 낼 수 없고, 당장 돌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이민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실제로 돌아간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 나를 포함해서 내가 아는 한국인들만 해도 여럿이다. 2세대가 모두 뿌리를 내리고 호주에 살고 있지 않는 한 많은 이민자들이 결국 그래도 한국이 마음이 편하네. 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했을까. 우리는 왜 역이민을 생각했을까. 우리가 한국으로 역이민을 결정짓게 된 건 코로나 시기에 한국에서의 5개월 여행을 했던 게 큰 계기가 되었다. 호주가 보더를 차단하고 해외여행을 금지시켰지만, 예외는 있었다. 우리는 그 예외의 조건을 충족했다. 인도주의적으로 가야만 하는 상황. 나는 산후우울증으로 가족들을 꼭 만나고 싶다고 지속적으로 호소했고. 정부는 신청 3번 만에 승인을 해주었다. (물론 요구하는 관련 서류를 모두 제출해야 한다) 다행히 그때 당시는 호주 빅토리아에서 확진자가 두 자릿수 아래로 확 내려갔던 때라 승인이 나왔던 거 같다. 승인이 나면 3개월 안에 출국을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부랴부랴 승인 한 달 뒤인, 티켓값이 그나마 저렴한 날로 골라서 한국행을 하게 된다. 돌아오는 날은 언제가 될지 모른다. 그래도 우린 일단 가야 했다. 두아가 9개월이 되었던 달이었다. 나는 두아와 첫 비행을 겁도 없이 시도했다. 그것도 코로나 시대에 말이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아기띠 위에 유모차 레인커버를 씌워서 비말 차단용 커버를 만들었고, 숨쉬기는 괜찮은지 여행 전부터 아이와 함께 써보곤 했다. 비행 중에는 두아가 바시넷을 이용할 수가 있었는데, 자는 동안에도 도사리고 있는 바이러스 침투의 가능성을 줄여보고자, 한 번밖에 안 쓸 거 같은 바시넷 용 커버도 100불을 주고 급하게 구매를 했다. 돈이 문제냐, 그놈의 코로나가 문제였다. 나와 남편은 바시넷에 쏙 들어가는 작은 아이에게 번갈아가며 영혼이 탈탈 털렸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멜버른에서 시드니로 비행. 그리고 시드니 공항에서 6시간의 대기. 그리고 인천공항으로 13시간의 장시간 비행. 검역. 인천공항에서 충북 진천으로. 진천 보건소에서 코로나 검사. 그리고 드디어 집. 호주 집에서 한국 집까지 장장 30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코로나 음성 문자를 받기 전까지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검사 결과는 이틀 뒤에 문자로 왔다. 드디어 왔다. 한국!



 한국에서는 장장 6개월을 있었다. 7월에 입국했고 그다음 해 1월에 다시 호주로 떠났다. 호주를 정리하기 위해서. 6개월간 한국에서 지내면서 여행도 많이 다니고, 가족들과 시간을 충분히 많이 보냈다. 한국에서도 엄마의 그늘을 찾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엄마가 만들어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나는 치유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가족의 울타리가 많이 불안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신 아버지는 여전히 위태로우셨다. 아닌 듯 하지만 나의 눈에는 그러했다. 잘 지내고 계실 거라는 생각은 나의 바람이자 이루어질 수 없다는걸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나에 대한 위로였는지도 모르겠다.

 코로나가 터지고, 기적적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가족들과 생활하며 지내다가, 이제 호주를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런 불편한 마음속에서는 과연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일인가 하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호주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경제력을 잃었다. 둘이 벌던 가계경제가 거의 반토막이 났고, 코로나가 터지고 나서는 남편의 수입도 온전치 못하다. 남편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대책이 없었다. 남편도 지쳤고 나도 대책이 없었다. 어쩌면 우리가, 내가, 가족의 울타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먼 미래보다 당장의 현실만을 생각하며 잠시, 아니 어쩌면 오래 혹은 아주, 한국으로의 역이민을 결정하게 된다.




극적으로 한국에서 하게 된 두아의 돌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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