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쾃 자세를 한 번 해볼까?"
헬스장이 아니고 분만실이었다. 3시간째 힘주기를 하고 있는데 아이가 산도를 빠져나오지 못하자 미드와이프가 나에게 침대 위에 서서 스쾃 자세를 하길 권유했다.
사시나무처럼 떠는 내 다리를 쳐다보며 누워있던 나는,
"난 못해. 내 다리가 너무 흔들리는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미드와이프는 어쩔 수 없군.이라는 표정으로 뭐라 뭐라 얘기했고.
"이대로라면 수술을 하거나 포셉으로 아이를 꺼내야 할 수도 있데."라고 나를 (정확히 말하면 내 왼다리를) 붙잡아주던 남편이 통역해주었다.
뭐? 그건 안되지...
나는 물에 젖은 비닐처럼 침대에 축축하게 붙어 늘어져 있다가 수술과 포셉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어딘가에 아직도 힘이 남아있었는지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진통이 잠시 주춤한 사이에 몸을 뒤집었고, 그사이에 다시 진통이 와서 잠시 죽을 거 같다가, 진통이 잠시 주춤한 또 그 찰나에 수술 침대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엉거주춤 스쾃 자세를 만들었다. 그렇게 까지 해서 힘주기를 시도했지만 아기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다시 누워볼까?" 미드와이프는 계란 프라이 뒤집 듯 말을 바꿨다.
Hey you!!! 이게 그렇게 쉬운 문제냐!!!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들바들 떨며 침대 난간 손잡이와 남편 손에 의지하며 다시 누웠다. 눕는 것도 막바지 진통이 진행되는 중에는 고행길이었다. 미드와이프는 다시 누워서 힘주기를 하라고 했고, 내 남편에게는 내 다리를 아까처럼 계속 밀어 주라 고했다. 그렇다. 남편은 유도 분만하러 병원에 온 순간부터 거의 간호사로 내 옆에 있다. 우리 각자에게 임무를 주문한 후 그녀는 따뜻한 물을 적신 거즈를 가져오더니 내 회음부를 마사지를 하기 시작했다. 호주는 회음부 절개가 없다. 예전에 한국에서 출산을 했던 선배 엄마들에게 듣기로는 회음부를 칼로 자르는데, 진통이 너무 아파서 그건 느낌도 안 난다고 했다. 너무 많이 상처가 나지 않도록 미리 잘라주는 걸 회음부 절개라고 한다고...
하지만 호주는 그걸 해주지 않는다. 대신에 상처를 최소화하기 위해 회음부를 따뜻한 물을 적신 거즈를 계속 갈아가며 지속적으로 마사지를 해서 이완시켜준다.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일부러 상처를 내지 않는 것에 나는 오히려 반가웠다. 제모도 관장도 없다. 한 창 힘주기를 하다가
‘나 똥 쌀 거 같은데 그럼 어떡해?’ 하니
‘괜찮아 우리가 다 케어할 거니까 넌 걱정 말고 푸시해.’라는 그녀. 내 똥을 받아준다는 사람은 처음이다. 쏘쿨.
이렇게까지 자연주의 일 줄이야.
"에... 에.. 에피듀럴!"
무통 주사를 외치던 그때는 (이미 골반이 많이 벌어져 늦었기도 했고) 주사 대신 해피 가스가 나오는 호흡기를 입에 달아주었다. 그러나 효과는 없다. 유일하게 효과를 본 라마즈 호흡법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막바지 힘주기에도 아이는 내려올 생각을 않고, 나는 거의 모든 힘을 다 소진해 갈 때쯤이었다.
"Hi!!!"
누군가 큰소리로 인사하며 들어와 나를 보고 웃는다. 드디어 닥터가 왔다.
“.. 하.. 하 이….” 그 와중에 나는 인사도 한다. 호주 와서 인사성이 굉장히 밝아졌다. 이게 다 동양인이라고 무시당하기 싫어서 벌어진 무의식 중의 피해의식이 낳은 결과랄까. 그래도 그게 좋은 습관이라 다행이다.
인사를 하면서 그녀의 눈을 보았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눈빛. 활기찬 미소. 그녀였다. 나를 구원해줄 사람.
"내가 30분 안에 아이 만나게 해 줄게~~ 잠시만~~~~"이라고 하더니 분만실 안에 있는 샤워실로 가서 기다란 배쓰 타월을 가져온다. 그리고 양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더니 번쩍하고 내 침대 위로 올라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무릎에 내 발을 가져다 올려놓는다. 몇 초도 안 되는 사이 벌어진 일이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응? 이게 호주 스타일? 인가?
"자, 수건 잡고 진통이 오면 나랑 동시에 4번만 잡아당기자."
타월을 반으로 접어 양끝을 내 양손에 하나씩 쥐어준다.
앗.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통이 온다. 내 표정이 일그러지자 눈치챈 그녀는 수건을 잡아당긴다.
"원! 투! 푸쉬푸쉬 푸쉬푸쉬 푸쉬푸쉬!!!!!"
나는 죽을힘을 다해 힘을 준다.
가만,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그렇다. 사극에서나 보던 마님이 천정에서 내려온 허연수건을 잡아당기며 아이를 낳는 그 명장면을 내가 재연하고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몇 시간을 푸시를 해도 안 나오던 아기가 이렇게 3번 힘을 주니 머리가 쑤욱하고 내려왔다. 그러자 의사는 재빨리 쉬쉬쉬쉬-----하는 풀잎 소리를 내더니 내 몸에 힘을 잠시 풀으라는 거였다. 아기 머리가 회음부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힘을 줘버리면 머리가 확 하고 밀고 나와서 상처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때가 되었는지 침대 아래로 내려가 아이를 받을 준비를 했고 그녀의 요청에 따라 마지막 힘주기를 했다.
그러자 들려오는 나의 아기 울음소리. 줄곧 옆에 서서 자기 팔에 내 피가 묻은 줄도 모르고 내 손을 잡고 서 있던 남편도 울기 시작했고, 내 가슴에 안긴 아기를 보며 나도 울기 시작했다.
캥거루 케어. 의사가 아기를 꺼내자마자 미드와이프는 남편에게 탯줄을 자르라고 하고, 그 뒤로 바로 엄마의 가운을 열어 아기를 가슴에 안겨준다. 그리고 젖 냄새를 맡게 한다. 아직 눈을 못 뜬 아이에게 엄마의 냄새를 맡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미드와이프가 주사기로 한 두 방울 겨우 채취한 초유를 아기 입에 넣어 맛을 보게 해 준다. 그사이 다른 의료진들은 아래에서 후처치를 한다. 생각보다 긴 시간 나는 나의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아직도 그 느낌은 잊을 수가 없다. 후처치가 어느 정도 되고 나면 의사가 아이를 데려다가 바로 옆에서 상태를 꼼꼼히 체크해준다. 제일 처음 맞아야 하는 예방접종도 해주고 발목에 나의 정보와 같은 바코드 팔찌와 발찌도 채워진다. 그렇게 황금이는 나와 한쌍이 된다.
모든 처치가 끝나고 나는 이제 입원실로 가야 한다. 분만실과 입원실은 같은 층이지만 그래도 거리가 꽤 되었다. 한 발 한 발 바들바들 떨면서 1cm씩 움직였다. 병원 복도 벽을 따라붙어있는 손잡이의 용도를 이제야 이해했다. 그 손잡이에 한 손을 의지하고 다른 한 손은 남편을 의지하고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걸어 입원실에 도착했다. 간호사는 나를 따라 아이가 누워있는 바시넷 카트를 내 병실로 밀어다 주었다. 모자동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한국은 모자동실이 흔하지 않다고... 신생아실에서 따로 케어를 하는 것이지 모자동실이 당연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황금이 와 같은 방에 다른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남산처럼 불러왔던 배는 그대로인데 뱃속은 더 이상 꿈틀거리지 않았고, 대신 내 옆에 꼬물거리는 생명체가 하나 생겨 있었다.
'내가 아이를 낳았다니!'
비록 유도분만을 하긴 했지만, 유도분만도 병원에서는 잘 권하지않는다. 나는 예정일보다 2주 뒤에 황금이를 만났다. 40주를 한 참지나 42주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결국 유도분만을 한 이유는 42주를 넘기는건 산모나 아이에게도 안좋기 때문에. 아직 40주니까 일단 진통이 올 때까지는 우리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의료진의 생각을 나는 존중했다. 나는 일주일 열심히 걷고 짐볼을 탔다. 다행히 유도분만 전날 이슬이 비췄고 유도분만을 시작하자 급속도로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새벽 3시 촉진제 투여, 양수를 터트리고 진통 8시간. 자연분만으로 무통주사 없이 낳았다.
만약에 내가 무통 주사를 맞았다면 나는 끝내 수술을 해야 했을 거다. 스쾃 자세며, 진통이 오는 타이밍에 맞추어 수건 잡아당기기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려는 그 고통을 나도 함께 나누었다. 어쩌면, 그래, 아이는 원래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낳는 거구나. 원래부터 '자연주의'인 거지.
제모, 관장, 회음부 절개, 무통주사, 제왕절개. 의료상 필요하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 맞지만, 나는 최대한 순리대로 하고 싶었다. 이 부분은 산모들 각자 개인의 상황과 선택이 가장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가 선택한 방식이 출산에서 최고라고 주장하고 싶진 않다. 그래도 나에겐, 한국으로 잠시 가서 출산을 해야 할까 호주 병원에서 낳는 게 과연 괜찮을까 걱정했던 그 시간들이 무색하리만큼, 호주 병원에서의 출산과정은 내가 나의 아기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