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여행
해마다 2월이 되면 어디론가 가고 싶어진다.
2월이 좋은 이유는 어디를 가든 인파로
붐비지 않아서 호젓한 여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아직
소슬한 겨울이 남아 있지만, 따스한 봄햇살이
있어서 돌아다니기에 춥지 않아 좋다.
올해는 20여 년 간의 복원작업을 거치고
2019년에 일반에게 공개 된 미륵사지
석탑을 보기 위해 익산으로 향했다.
26일 오전 9시경, 미륵사지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바람은 쌀쌀했으나, 포근한
햇살이 비추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미륵사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왼쪽에 고분 모양의 지붕을 한 박물관이 있었고
화장실 이외에 불필요한 구조물들이 없었다.
여느 관광지와는 다르게 조잡한 치장이 없는
이곳에서 익산은 품격있고 광활하며
장중하다는 첫 인상을 갖게 되었다.
서동요와 무왕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서동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은 홀어머니와 함께
마를 캐다 팔면서 근근히 살고 있었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신라로 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선화공주는 밤마다 서동을
만난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거짓 소문을 믿은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쫓아냈고
서동은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리고 왔다.
끼니 걱정을 하자, 선화공주는 지니고 있던
금부치를 내놓았는데, 서동은 이런 것은 마 캐는
곳에 가면 많다고 하였다. 그 이후, 서동은 무왕이
되었고 선화공주의 소원에 따라 이 미륵사를
지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설화는 서탑을 해체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에 의해 사실과
다른 설화일 뿐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무왕 시절인 639년
왕후인 좌평 사택덕적의 딸이 세웠다고
씌여 있기 때문이다.
미륵사에는 가운데 목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석탑이 서있었다고 추정한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미륵사는
폐사되었고 목탑은 불타버렸다.
남아있는 석탑마저 무너져 내렸는데
서탑만이 절반 정도 무너진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일제시대에 시멘트를
발라 겨우 지탱해왔다.
그러다가 1999년 해체 보수 정비하기로
결정하고 2001년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18년에 완료 되었고 이듬해에 일반에
공개 되었다.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며,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즉 삼국은 처음에
모두 목탑을 세웠는데 최초로 석탑을 시도한
것이 백제인들이라는 것이다.
복원하는데 20년이란 긴 세월이 걸린 만큼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동탑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탑의 완전한 형태가 어떠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추측으로 섣부르게 완전한 형태를
만드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문화재
복원수준이 한층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원에 참여하신 분들이 그 점 때문에 얼마나
고민하고 열띤 논쟁을 하셨을지 짐작이 간다.
결국 남아있는 형태를 최대한 살리고 원래 있던
돌을 80% 정도 사용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복원된 탑을 이루고 있는 돌의
상당수는 1400년 정도의 나이인 것이다.
동탑과 비교해보면 돌에도 세월이 새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휑하니 사방이 뚫린 벌판에
버티고 서서 1400년 간 비, 바람, 햇빛,
눈과 서리, 태풍을 맞으며 어느 것은 버티고
어느 것은 무너져 내린 돌들이다.
그만큼 시간의 연륜을 품고 있기에,
단순한 돌이 아닌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격체처럼 존재하고 있다. 동탑과 비교되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동탑은 1974년 발굴조사를 하다가
서탑과 같은 석탑이 있었다고
추정하여 1991년 복원을 시작했다.
그리고 1992년에 완료했다.
세상에 단 1년만에!
사용된 돌은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을
기계로 깎아서 쌓았으므로 서탑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잘못된
문화재 복원의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겉보기에도 툭치면 날아갈 듯 가볍다.
현재 기단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별 감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