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에 들어서자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소년이 신을 수조차 없는 낡은 쪼리를 만지작거리는 장면이었다. 눈을 뗄 수 없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움직이는 기차에서 신발 한 짝이 역 플랫폼으로 던져지는 마지막 장면에선 가슴이 먹먹했다. 사십여 년 전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내가 신었던 만화 슈즈가 화면 속 쪼리와 겹쳐 떠올랐다.
이 영상은 20세의 여성 감독인 사라 로직(Sarah Rozik)이 만든 '다른 한 짝 (The Other Pair)'이란 4분짜리 단편영화로서 이집트 룩소르 영화제에서 수상했으며, 간디의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고 한다.
‘역 주변에서 생활하는 소년은 쪼리를 신고 다니지만, 끈이 떨어져 신을 수가 없게 된다. 소년은 기차를 타려는 부유한 옷차림을 한 소년의 새 구두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열두 시 정각, 들어오는 기차를 타려고 하는 사람들에 밀려 그의 구두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에 남겨지고, 그는 그대로 기차에 오른다.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구두를 주은 소년은 그에게 구두를 전하기 위해 달리는 기차를 따라 달려가지만, 건넬 수가 없게 된다. 소년은 기차를 향해 구두를 힘껏 던지지만, 플랫폼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때 기차에 있던 그는 자기가 신고 있던 다른 한 짝 구두를 벗어 소년에게 힘껏 던진다.’
눈길을 걸어도 차가운 눈 녹은 물이 스며들지 않는 신, 겉엔 털이 있어 털신이라고도 불렸던, 만화 주인공 캐릭터가 인쇄된 만화 슈즈는 어린 시절 가장 신고 싶은 신발이었다. 그것은 단지 희망뿐, 검은색 천으로 만든 헝겊 운동화와 검은 고무신이 내가 갖고 있던 신발 전부였다.
화면에 비친 소년의 낡은 쪼리는 내 신발과 닮아 있었다. 검은색에다 그것마저 낡았다는 것, 거기에 남루한 옷까지, 역 주변에서 서성대는 주인공 모습 위로 시외 버스정류장 주변을 배회하던 어린 내 모습이 습자지처럼 겹쳐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안 엄마는 졸업선물 겸 설빔으로 그토록 갖고 싶었던 하늘색 만화 슈즈를 사주었다. 설을 지내고 졸업식 전날까지 귀티가 철철 나는 그 신발만 신고 동네를 돌아다녔다. 땅이 얼고 녹는 것이 반복되는 이월날씨는 새 신발을 금세 붉은 흙투성이로 만들어 버렸다.
졸업식 전날, 신발에 엉겨 붙은 흙을 털어내는 것만으로는 깨끗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엄마는 신발을 비눗물에 담아 빨기 시작했다. 연탄 아궁이에 올려놓으면 졸업식에 갈 때 깨끗하게 신을 수 있다는 말에 안심했다.
졸업식 아침, 툇마루 아래에 놓여 있는 신발의 오른쪽 한 짝 겉이 검게 타서 눌어붙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탄아궁이에 있던 신발 한 짝이 불 쪽으로 쓰러지면서 그 모양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빨리 말리려고 불에 가깝게 놓고는 제대로 지켜보지 못해 그렇게 되었다며 엄마는 자책했다. 그 어떤 말도 안타깝고 속상한 내 마음을 달랠 주지 못했다. 학교에 가면 모든 아이가 검게 탄 신발을 보고 놀릴 것이라는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어떻게 그런 신발을 신고 졸업식에 간단 말인가?
그런 생각도 잠시, 만화 슈즈의 따뜻함을 대신할 것도, 신을 수 있는 변변한 신발도 없는 처지였다. 난 얼어붙은 운동장에서 발 시린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신발, 검게 탄 만화 슈즈를 신고 창피함을 무릎 쓴 채로 졸업식에 참석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검게 탄 내 신발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내가 받은 상과 아버지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온 사진사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며 몰려들었다.
지금도 옷보다도 신발에 더 눈길이 가고, 신발장에 가득 찬 신발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것은 그때 그 신발, 만화 슈즈 한 짝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