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사라져도 무덤은 여기저기에 웬만큼 남는다. 잘된 후손이라도 있는 무덤은 세월과 관계없이 예전 모습을 지키며 사람의 발길을 잡는다. 조선 시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은 삼정승이라고 하여 막강한 권력가였다. 영화를 누리다가 이승을 하직한 정승들은 죽음과 함께 자신이 잊힐 것을 두려워 했는지, 격식을 갖춘 무덤을 흔적으로 남겼다. 비록 그것이 백성의 피와 땀을 동원하여 만들어 졌다고 해도 그 자체도 하나의 역사이다. 어떤 무덤은 화려하고, 어떤 무덤은 초라하기 그지없게 된 이유는 자신의 영광이 후대까지 이르지 못한 탓이다. 사연이 어찌돠었든 무덤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살아 있는 역사의 흔적이다.
시흥시 향토 유적 1호라고 알리는 빛바랜 표지판은 전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소방도로를 따라 오 분 정도 걸어가면 조그만 안내판이 묘지의 방향을 알려준다. 좁은 골목길에 접어들면 낡은 집 한 채가 길을 막고 버티고 있다. 고개를 돌리면 오른쪽 밭 건너 야트막한 언덕에 봉분이 보인다. 잡초가 무성한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걸어가야 한다. 공장과 집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 무덤의 몰골이 초라하다. 향토유적이라는 안내판만 있을 뿐, 길도 없다.
기세등등하던 청풍 김가의 위세는 이백여 년이 지난 지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인근에 있는 이숙번, 하연의 묘는 오백여 년이 지나도 제대로 갖춘 무덤으로 남아 있고, 강희맹 묘와 그 주변은 왕릉과 견줄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다. 청풍 김씨 김치인의 가문은 숙종, 영조, 정조시대를 풍미하던 정승 가문이었다. 김치인의 조부는 우의정 김구, 아버지는 영의정 김재로, 김구의 아우였던 대제학 김유와 그의 아들인 좌의정 김약로, 영의정 김상로에 본인 김치인까지 치면, 할아버지 형제 밑으로 3대가 한 울타리 안에서 대제학 일인에 다섯 명의 정승이 쏟아져 나온 셈이다.
청풍 김씨인 아내가 자신의 집안이 한때 잘 나가던 양반 집안이었다고 할 때마다 난 코웃음을 쳤다. 김해 김씨, 경주 김씨, 광산 김씨, 안동 김씨는 들어 봤어도 청풍 김씨는 듣지 못했다고 빈정댔다. 이런 나에게 아내는 조선 시대 왕비를 배출한 몇 안되는 양반 가문이라고 항변했다. 김치인의 묘를 보면서도 그분이 청풍 김씨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주변에 있는 역사의 현장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김치인이 영의정을 지낸 청풍 김씨라는 사실과 효종 때부터 정조 말년에 이르기까지 백 오십 년 동안 청풍 김씨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치인은 숙종 때 우의정이던 김구(金構)의 손자, 영조때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아들로 숙종 42년(171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를 이어 영의정이 된 인물로 부자가 모두 영상이 될 때까지 임금은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가 섬겼던 젊은 시절 영조는 자신과 다른 의견이 있으면 상소와 논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영조와 동년배인 신하는 세상을 떠나고, 자신보다 아래 세대에 속하는 신하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아들뻘인 신하의 도움으로 나라를 다스린 것이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결정한 왕의 정책에 대해 신하는 감히 다른 의견을 제시하거나 반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라도 하면 네 아버지가 충신이었으니 너희도 나를 잘 따라야 한다고 영조는 신하를 설득했다. 아들뻘 신하가 대를 이어 같은 왕을 섬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연륜 있는 신하는 왕 주변에 없었다.
평소 당파에 초연한 김치인은 영조 46년(1770) 1월, 아버지에 이어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당쟁에 휘말려 그해 11월 영의정을 사임하고, 판중추부사와 영중추부사를 거치며 영의정에 다시 오르내린다. 영조48년(1772), 칠십 팔 세 영조는 탕평을 파괴하는 붕당결성을 우려하여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던 영의정 김치인을 대간의 탄핵을 받아 들여 유배형에 처한다. 그때 김치인 나이는 오십 칠 세였다. 조선 시대 그 나이면 노인이지만, 영조의 눈에는 그저 김재로의 철없는 어린 아들로 보였을 것이다. 곧 풀려난 김치인은 다시 영중추부사로 복직, 봉조하가 되어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 새 임금의 등극을 알리는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온다.
정조9년(1785) 김치인은 새로운 법전 <대전통편> 편찬을 주도하고 이듬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정조의 명을 받들어 당쟁완화에 힘쓴다. 정조11년(1787) 7월 영의정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12월 당쟁에 휩쓸려 관적(官籍)에서 삭출 당하는 파란을 겪는다. 정조14년(1790) 3월 75세 나이로 숨을 거둔다. 시호는 헌숙공(憲肅公), 깨끗한 처신으로 청백리에 책록 되었다.
김치인은 첫 부인으로 좌의정 이관명의 딸을 맞았으나 일찍 사별하고, 두 번째 달성 서씨, 세 번째 광주(廣州)이씨를 연달아 맞이하여, 1남 3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조카 김종춘(金鍾春)을 입양했는데, 역시 후사 없이 일찍 세상을 등지니, 당숙인 좌의정 김약로(金若魯)의 증손자 김성연(金盛淵)을 양손(養孫)으로 삼아 뒤를 잇게 하였는데, 김성연은 부사를 지냈다.
김재로 묘
아버지 김재로의 묘는 모든 것을 갖춘 채 사람을 반긴다. 무덤을 보면 자손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다고 한 어른의 말이 떠 오른다. 그 사람의 명성이나 권력이 자식이나 제자로 대대로 이어져야 죽어서도 호강한다. 안동에 조선시대 학자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보존된 것을 보면 제자를 통해 권력이 이어지고, 서원을 중심으로 자손 대대로 정신이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김치인의 묘는 시흥시 안현동 길마재 나지막한 언덕에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민가에 둘러싸여 묘역 환경이 좋지 않다. 조산(祖山)으로 소래산이 보인다. 첫 번째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와 두 번째 부인 달성 서씨(達城徐氏)와 합장묘이고, 세 번째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 묘는 합장묘 앞에 배치된 특이한 형태이다. 완산 이씨는 오른쪽, 달성 서씨는 왼쪽, 광주 이씨는 앞쪽에 자리 잡고 있다. 봉분 주위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봉분 왼쪽에 묘갈(墓碣)이 있다. 중앙에 상석과 높이 56㎝의 향로석, 좌우에 높이 1.74m의 망주석과 높이 63㎝의 석양(石羊)을 배치하였다. 석물은 기교를 부리지 않은 형태로 기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봉분 좌측에 1790년(정조 14) 세워진 묘표(墓表)가 있다.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은 높이 1.61m, 폭 68㎝, 두께 37㎝이다. 묘표의 비문은 이조판서 조돈(趙暾)이 짓고 아울러 글씨도 썼다. 전자(篆字, 전면 글씨)는 형 김치일(金致一)의 아들인 조카 김종순(金鍾純)이 썼다. 신도비는 일제강점기에 왜놈이 뽑아갔다고 전해진다. 1986년 3월 3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다.
김치인 무덤이 왜 이리 초라하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들어 보고 싶다. 그가 생존했던 당시에는 난 그 집 대문 앞에도 감히 얼씬거리지 못하고, 권문세가의 아들이 집을 드나드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내가 무례하게도 다가가 누워 있는 그에게 말을 건다.
‘ 그때 귀양가는 심정이 어땠수?’
‘ 부인은 세 명이나 있었는데, 어찌 남아 있는 자식이 하나도 없수?’
‘ 아버지가 모셨던 임금을 대를 이어 모시기가 얼마나 어려웠소?’
' 눈앞 호조벌 건너편에 강희맹은 양옆, 아래로 후손을 거느리고 누워 있는데 어떤 생각이 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