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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왕고래 Sep 13. 2022

사회생활… 당신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한 끗 차이'

최근 방송국 선배에게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를 판단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준은 결국 한 끗 차이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건 딱 다음 세 가지였다. 


1. 「건방진 것」과 「당당한 것」

2. 「고집」과 「주관」

3. 「편안함」과 「만만함」


이 세 가지를 듣고 난 이후 나를 포함한 주변이 달리 보인다. 정말 '한 끗 차이'로 아슬아슬 경계를 타는 이들이 많다. 혹은 아예 구분을 짓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 존재했다. 




첫째, 건방진 것과 당당함은 한 끗 차이다. 얼마 전 같이 출장을 나간 정 팀장에게 거래처 전화 한 통이 왔다. 예전에 보내줬던 문서 수신처를 수정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는 "지금 출장 중이니 사무실에 남아있는 동료 김 대리에게 해당 부분을 요청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들어보니, 이미 거래처에서 우리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었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은 이는 사무실 김 대리였다. 그는 거래처 직원의 요청에 "그 일은 제 업무가 아닙니다. 급하신 일이 아니라면 나중에 전화 주세요."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문서를 수정해서 보내주는 데에는 채 2분이 걸리지 않을 일이었다. 


혹시 남 모르는 사연이 있었을까? 궁금한 나머지 복귀 후 넌지시 물어보았다. "아니, 아까 왜 그렇게 매몰차게 거래처 전화를 끊었어? 정 팀장과 싸웠어?"라 말하는 내게 김 대리의 답변은 참 단호했다. 


"그건 제가 맡은 일이 아니잖아요. 전 제 일들로 남한테 절대 부탁 안 하거든요."


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사실 이 대답을 들으면서 나는 퍽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한껏 본인의 당당한 면모를 과시하려는 듯한 저 우쭐대는 표정과 말투 때문이었다. 평소 '개인의 시간'을 늘 강조하던 그 친구는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승리감'에 도취된 듯했다. 승자가 되기 위하여 회사와 주변을 적군으로 만들면서 말이다.




둘째, '고집'과 '주관'은 한 끗 차이다. 한때 나는 참 이상한 고집이 있었다. 내 업무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을 격렬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 회사에서 작업 때 쓰던 프로그램보다 훨씬 좋은, 새로운 프로그램이 출시됐을 때에도 그렇다. 선후배들이 하나둘 더 용이한 프로그램과 툴로 이동할 때에도 나는 '나만의 방식'이라며 저항했다. 


밤늦게까지 작업하던 우스운 버릇도 그렇다. 야간에 더 집중이 잘 된다며, 굳이 무리해서 새벽시간을 활용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아침은 없어지기 일쑤였고 점심때에도 몽롱한 느낌이 많았다. 그러다 다시 꾸역꾸역 밤부터 작업을 시작하다 보니 악순환이었다. 식습관을 비롯한 생활패턴도 그렇고, 건강에도 좋지 않았다. 


'주관이 뚜렷하다'라는 건 무엇일까? 내가 내세우고 있던 게 주관이었을까, 혹은 쓰잘 데 없는 옹고집이었을까? 하루 이틀 배워서 새로운 툴로 작업하다 보면 더 효율적으로 시간 분배가 가능했을 텐데. 아니면 더 멋진 기능을 활용하여 끝내주는 작품을 만들었을지도 모르는데. 


'고집'에는 근거가 없다. 반면 '주관'에는 확신과 믿음이 포함된다.




셋째, '편안함'과 '만만함'은 한 끗 차이다. 한 때 정말 의지했던 동료가 있었다. 같은 파트에서도 오래 근무했고 퇴근 이후의 시간도 자주 함께하는 등 우리는 퍽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가만히 돌아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친해서'라는 명목으로, 사내에서 그가 하는 모든 부탁들이 나에게 돌아왔다는 것이다. 한창 바쁜 시기 휴가를 낸 뒤의 대체인력, 저녁 약속이 있다며 급하게 맡기고 간 무수한 일들…. 그로 인한 야근은 물론 주말 당직까지 기타 등등 무수했다. 


글쎄... 친하고 편하니까 항상 배려해주고 마냥 모두 수용해주어야 할까? 고맙게도 이런 고민을 하던 내게, 선배님이 시의적절한 말씀을 해주셨다. "그건 편한 게 아니라 그냥 네가 제일 만만한 거지."라는 말을 듣고 알았다. 아, 그렇구나. 나는 저 사람에게 '뭘 부탁하고 의지하기 편리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걸 마냥 나쁘다고만 볼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 과정에서 나는 녹아내리고 있다. 때문에 이 관계를 어느 정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한 거리를 둔다거나, 혹은 그자와 멀어지는 것 말이다. 


그러자 녹아내리던 내가 다시 회복되었다. 




살벌한 사회 속에서 과연 나는 어떤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나. 

그리고 나를 둘러싼 이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포지셔닝하고 있는가.


또, 그들과 나는 어떻게 '한 끗 차이'로 나뉘고 있을까?

재미있는 생각에 잠긴 오후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결국 후세대에게 미개한 선조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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