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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리 Feb 03. 2024

그러려니

한동안 아무것도 읽지 않고 쓰지 않고 듣지 않고 지냈다. 생각이 밀려들지 않으니 정적에 오래 잠겨 있어도 빠져죽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밀어내지 않아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외면하기에 익숙해져서인가? 약을 먹지 않아서인가? 숨이 가쁠 때가 가끔 있지만 그렇게 신경쓰이진 않는다. 별일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별일이 생길 계기 없는 일상의 반복. 이상하리만치 괜찮고. 의아한.

병원을 다시 갈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 이유가 아무것도 만들 수 없어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아서 같은 이유라면 가고 싶지 않다. 그 비중이 나아지고 싶음보다 크다면. 지금 상태는 꽤 괜찮다. 억지로 잊은 것을 꺼내어 그래 나는 이렇지, 이런 사람이지, 결국 그렇지, 하지 않는다. 그냥 본다. 그냥 나를 본다. 실패한 나를 가져오지 않고, 빛나던 시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금 여기에 놓여 있는 나를 보고 있으면. 

그러려니 한다. 그렇구나 한다. 이게 내가 영위하고 싶은 앞으로의 삶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것으로 되었어,가 아니라 이 위에 쌓아갈 것들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열패감과 죄책감과 대상이 사라진 그리움을 다 날려버린 뒤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좋은 징조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새로이 쌓이는 게 다시 열패감일지도 모른다. 날것의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감당하기 벅찬 무게일 수도. 

그러면 그것만 내 것이다. 여기부터 내 것이다. 언제부턴가 휴대폰을 교체할 때 어떤 파일도 옮기지 않게 됐다. 정말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예전 폰을 열어보겠지 하며 내버려 둔다. 그렇게 전화번호부는 아주 가끔 다시 채워지고. 지우지 못해 남겨두었을 사진과 대화는 생각보다 궁금하지 않게 된다. 열어보지 않게 된다. 가짐으로써 기꺼이 잃어버리는 것. 돌아보지 않고, 열어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밀린 음악을 한가득 듣고 있다.

오랜만에 기타를 쳐볼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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