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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벌새날다 Dec 28. 2021

어떤 저녁

20211228

아이의 교정치료로 매달 가는 치과의 정기검진이 끝나고, 1층의 카페에서 마카롱을 샀다. 단 것이 끌리는 그런 날이 있다. 아이에게도 마카롱을 하나 골라보라 했지만, 아이는 2500원짜리 단품 마카롱 대신, 과자잡화점(잡다하고 저렴한 과자들을 쌓아놓고 파는 무인과자점)에서 1500원을 꽉 채워서 300원짜리 다섯 개를 샀다. 아이의 구매 목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삼겹살 모양 풍선껌 2개. 대체 삼겹살 모양의 풍선껌을 왜 먹고 싶은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은 단무지 모양 젤리나 삼겹살 모양의 풍선껌 등 외형과 본질이 영합하지 않는 간식들에 열광하는 편이다. 물론 한번 먹어보면 흥미가 확 줄어들긴 한다. 그리고 트롤리 젤리, 짜내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튜브 형태의 초콜릿 등. 아이의 시각은 언제나 다다익선이다. 싸구려라고 해도 이것저것 많이 맛보고 싶은 것. 2500원짜리 솔티카라멜맛 마카롱보다는 300원짜리 다섯 개를 손에 그득히 들고 가고 싶은 마음, 나도 그런 마음에서 떠나온 지 얼마 안 되었다. 아마 그건 아이와 어른의 차이라기보다는, 한정된 재화를 사용해야 하는 존재의 고민 같은 것일 테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사, 라고 드라마 속의 실장님이나 본부장님처럼 너그럽게 말해주고 싶지만, 엄마인 내가 허락하는 것은 언제나 1500원이기에, 1500원짜리 하나를 사기보다는 나누어서 이것저것 먹어보고 싶은 아이의 마음, 생각해보면 난 대학생 때까지도 정말로 싸구려 옷들을 사들이곤 했다. 과외를 해서 번 그 달의 급여로 크게 지갑을 한 번 열어 좋은 옷을 살 용기는 쉽게 나지 않아서, 기왕이면 많은 옷을 갖고 싶은 마음으로 이대 앞과 고터를 헤매며 자잘자잘하고 저렴한 옷들을 여러 벌 샀더랬다. 그리고 그 옷들은 한 번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오면 쇼윈도에 걸려 나를 유혹하던 앞태와 옆태를 다 상실해 자신들의 가격을 입증해내곤 했다. 그래도, 솔직히 말하면 꽤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기왕이면 싼 것을 많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더랬다. 10만원짜리 구두 한 켤레보다도, 3만원짜리 구두 세 켤레가 훨씬 끌리고 아쉬웠다. 안다. 비싸고 좋은 것을 사서 오래 쓰는 것이 더 현명한 소비라는 것을, 그런데 아는 것과 끌리는 것, 아쉬운 것은 다르다. 아홉 살 아이가 마카롱을 떨치고 자잘자잘한 중국산 주전부리들을 사들이는 것에서, 나는 그닥 몇 발짝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 최승자, 내 청춘의 영원한     


30대 초반에, 청춘이란 단어를 한참이나 비껴 지나왔다 생각할 만큼 마음이 늙어가던 때가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하릴없이 들쳐 본 책에서 이 시를 읽고 가슴이 찌르르했던 적이 있다. 

이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 알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부족함 없는 세계,를 책이나 영화에서 읽는 것은 때로는 동경을 불러 일으키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결핍이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사랑하고 좋아했던 것 같다. 

부족함 없는 세계는 내가 속할 자리 같은 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열패감, 이라는 말 대신에,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이라는 말로 대신해 본다. 

날이 흐리고 유독 빨리 어두워지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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