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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미숙 Dec 09. 2021

콜센터 10년, 그 속에서 얻은 보물들

콜센터 10년 차 만년 대리 이야기

콜센터에 10년을 다니면서 잃은 것도 많지만 그만큼 얻은 것도 많다.
매달 연차를 병원 순회할 때마다 사용하면 화가 나지만 나 자신이 많이 발전한 건 정말 기분이 좋다.
학창 시절에는 나 하나 불편하고 참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네네 했었는데 지금은 나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콜센터에 입사하고 가장 놀라웠던 건 상담사들이 다 멀티플레이어라는 점이다.
몇 개월 상담을 하다 보면 고객님들의 질문이 중복된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고객님들의 질문은 매번 새롭고 다양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식인처럼 회사 매뉴얼이 모두 담겨 있는 웹페이지에서 검색한다.
즉, 고객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회사 매뉴얼을 검색하고 그에 맞는 전산처리를 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상담한 내용을 다음 상담사가 참고할 수 있도록 잘 정리해서 기록을 남겨야 한다.

 






보통 전화를 끊고 30초 이내에 상담 이력을 남긴다. 그리고 다음 전화를 받는다.
정말 상담의 고수들은 이 모든 걸 고객님과 통화할 때 끝낸다.







 

다른 콜센터를 다니시다가 우리 회사 오신 분들이 시간 압박이 조금 덜하다고 말씀하셨던 거 보면 타 회사 콜센터도 상황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꼼꼼한 성격 때문에 통화하면서 전산 처리하면 오류가 발생할까 봐 양손 꼭 모으고 상담했었다. 말하면서 타자를 치고 전산을 보는 행동은 나에게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1년, 2년 콜을 받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멀티플레이어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평상시에도 멀티플레이어가 가능하다. 동시에 두세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TV 보면서 게임과 코 바느질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책을 보면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하루 종일 상담을 하다 보니 말 잘하는 능력도 생겼다. 물론 매년 100권 가까이 읽었던 책들도 도움이 되었지만 상담하면서 배운 말 하는 스킬은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하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내 입장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의 나였으면 속으로 끙끙거리다가 마음의 병을 얻었을 것이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발표가 무서웠다. 모든 시선이 나한테 주목될 때 손에서 땀이 났다. 그런 나에게 신입사원 교육이라는 업무가 주어졌을 때 일주일 내내 장염이 올 정도로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그래도 직원 나부랭이는 월급을 받으려면 주어진 일을 해야 하지 않는가.
처음은 힘들었지만 어느 순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유롭게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정말 대단한 발전이었다. 매번 사람들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는데 이젠 당당하게 앞으로 나올 수 있다.

 






그동안 수많은 고객님과 수많은 콜센터 직원들을 만나보았다.
나는 4년 정도 전화를 받다가 다른 부서로 옮겼다.
이 정도 상담을 하니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고객의 첫인사를 듣고 나면 이 사람이 천사인지 악마인지 어느 정도 구분되었다.






 

또 새로 들어온 직원의 첫인상만 봐도 그 사람의 전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콜센터 업무에 진심인지 아니면 시간만 때우다가 퇴근할 사람인지 구분되었다.
또 나와 같은 성향인지 다른 성향인지 구분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보다 기가 센 사람들에게는 내가 상처를 받지 않게 먼저 조심했다. 나는 기가 거의 제로에 가까우기 때문에 작은 거에도 상처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는 아주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회사 동료들과는 가족들보다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좋은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한다.







 

회사 근속연수가 늘어나면서 정기적으로 가야 하는 병원도 늘어나고 있지만 긍정적인 면부터 보고 싶었다. 콜센터 10년을 다니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들을 많이 발견한 거 같아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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