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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미숙 Dec 20. 2021

콜센터 10년, 청춘을 도둑맞았습니다

콜센터 10년 차 만년 대리 이야기

22살 끝나가는 여름, 콜센터에 정직원으로 입사했다.
10년 동안 출근하면서 회사도 많이 변했고 내 건강도 많이 변했다.
솔직히 말하면 회사에 대한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들이 훨씬 많다.
정말 다행인 건 나쁜 기억이 정확하게 생각 안 난다는 것이다.
흐릿한 기억들 덕분에 아직까지 회사를 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가끔 일이 잘 안 풀릴 때
"아~ 암 걸리겠네."
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한다.
내가 암 환자이기 때문이다.








 

7년 전 출근하던 도중 위경련으로 정신을 잃었다.
이미 일주일 전부터 장염으로 고생 중이라 기력도 마음도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응급실로 실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옆에 아무도 없었다.
그게 참 서러웠다.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 흘렀다.
위가 아파 나오는 눈물인지 마음이 아파 나오는 눈물인지 몰랐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낯선 병원에서 나와 쳐다본 하늘은 너무 눈부셨다.
회사로 어떻게 돌아가지라는 생각보다 이제 그만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나의 퇴사를 반기지 않았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다른 지역에 새로 만든 센터로 이동하게 되었다.
최소한 상급자와 면담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쫓기듯이 벗어났다.

새로운 센터는 집에서 지하철로 왕복 4시간이 걸렸다.
지하철 종점이라 푹 자고 일어나도 도착을 안 했다.









놀라운 건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센터에서의 내 직급은 부팀장이었다.
죄다 신입인 사원들 사이에서 콜을 받으며 질문에 답변도 하고 늦게까지 남아서 질의응답한 파일도 정리했다.
관리자들이 부족하다 보니 팀장 업무를 보는 날들이 많았다. 내성적인 나는 사람 관리가 힘들어 내 안의 분노는 항상 넘실거렸다.
회사에서도 조금만 고생하면 정식 관리자로 진급시켜주겠다는 분위기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 건지 타이밍이 안 맞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관리자는 되지 못했고 나와 맞지 않은 일들을 하면서 스트레스만 쌓여갔다.










그리고 매년 회사에서 하는 건강검진에서 자궁경부암이라는 병이 발견되었다.
그때 내 나이 27살이었다.
20대에 암이라니!
정말 너무너무 억울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항상 남을 생각하며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암이라니.








치료를 받으면서 회사를 다니는 건 정말 힘들었다.
정신적인 충격 때문인지 몰라도 매일 머리가 아팠고 2층 계단만 올라가도 100미터 달리기 한 사람처럼 숨이 차올랐다.
아프면 퇴사해야지 남한테 피해 준다고 떠들었던 어느 팀장의 말에 눈물을 삼키며 콜을 받았다.









지난달에 드디어 완치가 되었다.
나는 아직도 회사에 다니고 있고 나에게 상처 주는 말을 했던 사람들은 퇴사했다.
잘 버티고 웃고 있는 지금 내 모습이 정말 기특하다.


건강은 조금 잃었지만 많은 것을 얻었다.
이제 남이 아닌 나의 행복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바보처럼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지 않고 몽땅 뱉어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갑자기 착했던 사람이 화를 내면 잘 참던 사람이 화를 낸다고 욕한다.
또 화를 내지 않으면 나중에 왜 그때 얘기하기 않고 속으로 참았냐고 욕한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나의 어떤 행동에도 욕을 할 것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20대의 모든 시절을 회사에서 보냈다.
회사와 집만 착실하게 다녔고 나는 아직도 클럽에 가보지 못했을 만큼 바른생활을 해왔다.
주중에 술을 먹거나 주말에 술을 먹으면 다음날 출근에 지장이 있을까 봐 술, 담배도 하지 않았다.
지금 클럽에 가면 입구 컷을 당하겠지만 괜찮다.
집에서 나 혼자 비 오빠 음악 틀어놓고 춤추는 게 더 신난다!
연차가 많지 않아 긴 여행도 하지 못했다.
20대 때 할 수 있는 경험들을 다 못해보고 지나온 것이 너무 아쉽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서 행복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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